[안승준의 다름알기] 지하철, 놓쳐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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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떠난 철도 뒷모습
사진=더인디고
  • 사람들은 각자의 시간을 각각의 속도로 살아간다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안승준 집필위원] 코로나 덕분인지 때문인지 일정표의 빈 곳이 늘어나는 요즘이다. 지인들과의 모임 자리도 당연히 줄었지만, 업무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확연하게 그 수가 적어졌다.

귀가 시간이 빨라진 며칠 전에도 조금은 어색한, 이른 시간에 지하철을 이용하게 되었다. 개찰구에 카드를 찍고 들어가는 순간 내가 타야 할 당고개행 열차가 도착한다는 안내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계단을 향해 달렸고 내 목적은 오로지 내가 탈 수 있는 가장 빠른 열차를 놓치지 않고 탑승하는 데에 있었다.

사람들은 지팡이 짚은 시각장애인이 계단을 달려 내려가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봤을 수도 있겠지만 나도 익숙한 공간에서는 때때로 달린다. 보통 사람들이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정도라고 말하는 건 그래서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말이다.

그건 그렇고, 난 최선을 다해 달렸지만 지하철을 아깝게도 놓치고 말았다. 턱밑까지 헐떡이는 숨소리와 요란하게 출발하는 열차 소음이 교차하면서 순간적인 허탈함을 느꼈다.

내가 그 지하철을 꼭 타야 할 이유는 없었다. 난 평소보다 몇 시간이나 일찍 퇴근했고 집에 가자마자 급하게 마무리해야 할 일 같은 것도 없었다. 그냥 승강장에서 들리는 벨 소리에 반사적으로 달렸고 위험했지만 놓치지 않으려고 몸을 던졌다. 열차를 놓쳤어도 나에겐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몇 발자국 물러서서 이어폰을 착용하고 음악을 틀었다. 헐떡이는 숨소리와는 상반된 조용하고 차분한 음악이 들렸다. 편안해지는 마음에 괜스레 다음 지하철도 타지 않고 보냈다. 몇 곡이 더 연주되고 그 시간만큼 지하철도 몇 대 더 지나갔다. 천천히 지하철에 올랐고 도착할 역에 내려서도 집까지 아주 느린 걸음으로 돌아왔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런다고 해서 내 삶에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일찍 들어왔다면 책 몇 글자 더 읽거나 남들보다 조금 빠른 뉴스 기사들을 볼 수는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내 삶은 많은 부분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느리게 진행한다. 친구들은 20대에 마쳤을 일들을 30대 끝 무렵이 되어서야 해결하기도 하고 남들은 한두 시간이면 해결할 과제를 며칠씩 끙끙 앓기도 한다. 그래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조급증이 나를 뒤따른다.

요즘 마흔을 넘어가려는 시간 속에서, 30대에 하지 못한 일들에 대한 쫓김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조금 더 뒤처지거나 느려지지 않게 서두르려는 마음을 가졌던 듯하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엄청나게 빨라지지도 않거니와 그렇게 달릴 필요가 특별히 있지도 않다.

내가 아무리 힘껏 달려도 붙잡지 못한 기차는 떠나고 그 기차를 놓쳐도 다음 기차는 언제나 찾아온다. 최신 드라마를 리뷰하고 오늘 나온 새 음악을 감상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고 그것을 접한다고 해서 본질적인 감동이나 기쁨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시간을 제각각의 속도로 살아간다.

꼭 붙잡아야 할 지하철이 없는 것처럼 그 나이에 꼭 해야 할 일도 없다. 탈 수 있는 열차를 한 번쯤 보내고 잠깐의 여유를 느끼는 것도 때때로 필요하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반강제적인 여유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쓸데없는 서두름이나 조급함은 없었는지 천천히 느껴봐야겠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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