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기회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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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면서 다리(bridge)
▲길이면서 다리(bridge) ⓒ픽사베이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이번 정류장은 OO입니다.” 양쪽 귀에 이어폰을 착용하고 꾸벅꾸벅 졸던 지하철에서 목적지 알림 방송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후다닥 가방을 챙겨 나오며 역을 지나치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후유!” 하는 깊은숨을 내뱉었다.

‘아차차차차차!’ 지하철에 오를 때와는 다르게 한 쪽 손이 너무 가볍고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 때쯤 머리 위에 올려 두었던 쇼핑백이 생각났다. 어머니 가져다드리려고 오는 길에 샀던 작은 파이를 잠시 선반에 놓아두었던 것을 급히 내리느라 깜빡했다.

“어쩔 수 없지 뭐. 필요한 사람이 드시겠지.”라는 체념의 마음과 “어떻게 하면 물건을 찾을 수 있을까?”하는 두 갈래의 마음 사이에서 난 전화 몇 통 정도는 투자해 보는 쪽으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친절한 목소리로 응대하시는 역무원 아저씨에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말씀하신 시간부터 우리 역사까지는 10분 이상 걸리니 그때쯤 살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별일 없으시면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다만 종착역이 어디인지 기억이 안 난다고 하시니 다른 종착역에도 연락 한번 해 보시는 것이 좋겠네요.” 어떻게든 도우시려는 직원의 응대에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바로 다음 종착역에도 같은 연락을 드렸다. “아! 물건을 두고 내리셨다고요? 20분 정도면 우리 역에 들어오는데 그때까지 연락 없으면 못 찾는다고 생각하셔요. 두고 내린 물건 찾는 게 쉽지 않습니다.”

같은 질문, 같은 설명이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 기분 탓이겠지만 갑자기 물건이 영영 없어져 버린 것만 같고 쓸데없는 희망을 품는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하철에 함께 타고 있던 아내와 서로 위로하면서 편하게 잊으려고 할 때쯤 전화기가 울렸다. “말씀하신 쇼핑백 찾았습니다. 음식인 것 같은데 냉장 보관해 드릴까요?” 친절하게 응대해 주시던 처음 역의 역무원께서는 냉장 보관까지 해 주신다며 끝까지 감동을 선물해 주셨다.

작은 음료 한 박스를 가져다드리며 잃어버렸던 물건을 무사히 찾을 수 있었다. 친절함으로 인해 물건이 찾아지고 불친절함으로 인해 찾을 수 있는 물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것과 가능성마저 꺾어버리는 것은 결과적으로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다.

내가 만약 두 번째로 전화를 받았던 역무원과 더 먼저 통화를 했다면 물건 찾는 것을 애초에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가능성이 없는 일에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보다 차분하게 마음을 다스리는 쪽을 택했을 것이고 그것은 다음의 시도에서 빠른 포기를 하게 되는 근거로 작용한다.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신 분이라 하더라도 언제나 물건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상황에서는 설령 물건을 찾지 못 한다 하더라도 미련 없이 후회 없이 깔끔하게 단념할 수 있다.

최선을 다할 기회를 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다음번의 최선을 보장하는 마중물이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살아가다 보면 시도도 해 보기 전에 가능성을 막아버리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헬스장이나 수영장은 위험해서 받아줄 수 없고 의사나 화가는 눈이 꼭 필요하므로 꿈꿔서도 안 되고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니 놀이기구도 탈 수 없다. 그중에 어떤 것은 완전히 잃어버린 물건처럼 결과적으로는 내게 불가능의 영역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오르려고 노력하다가 오르지 못하는 것과 오를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다르다.

운동을 하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놀이기구를 타는 것도 남들과 같은 방법으로 하지 못하는 것일 뿐 기회를 주면 나만의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 세상 대부분의 과제는 내게 그런 것이다. 정말 시력 없이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있긴 하겠지만 그런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아직 할 수 있다는 상상을 못 해 보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

지하철에서 물건을 놓고 내린다면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찾을 수 있을지 찾을 수 없을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찾고 싶은 사람에겐 최대한 찾을 기회를 줘야 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나는 동네 헬스장을 이용할 수 있을까? 위험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로 위험한지 조금 다른 방법으로라도 사용할 수 있는지 시도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어려움을 느껴본 것과 불가능을 마주하는 것은 조금의 차이인 듯 보이지만 마주할 내일을 도전과 포기로 가르는 경계가 된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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