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경의 컬처 토크] 당신을 당신이게 만든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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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초 영화의 한 장면 ⓒ유튜브 화면 캡처
▲37초 영화의 한 장면 ⓒ유튜브 화면 캡처
  • 영화 ‘37초’(2019)

[더인디고=차미경 편집위원]

차미경 편집위원
▲차미경 더인디고 편집위원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아슬아슬 가슴을 졸였다. 스릴러 액션영화냐구? 아니다! 스릴러 액션과는 거리가 먼 한 장애여성의 도전과 성장을 다룬 휴먼드라마다. 그런데 왜 가슴을 졸였냐구? 그 얘기를 지금부터.

영화<37초>는 만화가를 꿈꾸는 뇌병변장애인 여성 유마의 도전과 성장기이다. 유마 역은 실제로 뇌병변장애를 가진 카야먀 메이가 직접 연기해서 극의 현실감을 더했다.

유마는 만화가인 친구 사야카의 집필실에 매일 출퇴근하며 그녀의 보조작가로 일한다. 사야카 작품 대부분은 유마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결과물이지만 사야카는 대중들에게 유마를 숨긴 채 그녀의 아이디어만 착취하고 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유마는 만화가로 데뷔할 기회를 스스로 찾기 위해 여러 출판사에 도전해 보지만 모두 거절당한다. 유일하게 유마에게 연락을 해온 사람은 성인지 주간 ‘붐’의 편집장인 후지모토. 후지모토는 유마의 만화를 칭찬하면서도 성에 대한 묘사에서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남자와 첫 경험을 하고 자신을 다시 찾아오라는 도발적인 과제를 내주는데… 유마의 모험은 이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보는 내내 가슴을 졸였던 이유는, 유마가 아빠를 찾는 여정에 동행하는 도시라는 남자와 ‘기승전사랑’으로 엮이게 될까 봐서였다. 도시는 유마가 엄마의 과잉보호로부터 뛰쳐나왔을 때 그녀를 도와준 성매매 여성 마이의 운전기사다. 도시는 가출해서 갈 곳 없는 유마를 자기 집에서 지낼 수 있게 해주고 그녀의 아버지와 언니를 찾아 떠나는 태국으로의 여정까지도 함께 한다. 한집에서 지내게 된 두 남녀, 여행 중 한 숙소 한 침대에서 지내는 두 남녀가 슬쩍 눈만 마주쳐도, 안색만 좀 달라져도 둘이 꽁냥거릴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하던지. 유마의 용감한 홀로서기가 자칫 장애인과 비장애인 천사의 뻔한 사랑 얘기로 흘러가 버릴까 봐서 말이다.

다행히 그들은 어설픈 로맨스로 엮이지 않았다. 좌충우돌 모험을 통한 유마의 성장으로 끝을 맺는 영화여서 휴,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내게 이 영화는 꽤 복잡한 심경이 드는 영화였다. 지금도 이 영화를 생각하면 수많은 말들이 파도처럼 우르르 밀려왔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한다.

장애가 있는 주인공을 장애인이 직접 연기하고 주체적으로 그렸다는 점, 장애인의 삶을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는 점, 그저 그런 사랑 얘기가 아니라 스스로 한계를 깨며 도전하고 성장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로 그려냈다는 점 등 여러 칭찬할 점에도 불구하고(제69회 베를린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으며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내겐 불편한 지점이 여럿 있었다. 아직도 내게 가시처럼 남은 장면은 유마가 첫 경험으로 성을 사기 위해 성매매 남성과 모텔에 갔던 장면. 돈을 받으면서도 마치 선심 쓰듯, 자선하듯 유마를 애무하던 그 남자. 결국 그는 도저히 비위가 약해서 안 되겠다며 서둘러 방을 빠져나가고 유마만 덩그러니 홀로 남는 그 장면에서 나는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꼈다. 사람들은 이 장면을 어떻게 느꼈을까.

지하철 문이 열리자 대기하던 역무원이 휠체어 탄 유마가 안전하게 하차할 수 있도록 안전 발판을 놓아 주던 이 영화의 첫 장면을 인상 깊은 장면으로 꼽은 사람이 많았다. 틈이 넓고 단차도 심한 승강장에서 휠체어 이용자들이 매번 위험을 무릅쓰고 번지점프 하듯 지하철을 이용해야 하는 우리 현실을 잘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장면에서 감탄했다. 그러나 바로 이 장면을 바라보는 시각차에서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이 나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도 승강장 사이가 아주 넓거나 단차가 심한 역에서는 이런 안전 발판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위험하고 불편한 시설을 그런 인적서비스로 대체하기보다는 편리하고 안전하게 시설물과 시스템을 개선하는 쪽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승하차 시 일일이 서비스를 요청해야 하고 이동 중 갑자기 목적지가 바뀌는 상황이 발생하면 사람에게 의존하는 인적서비스는 그런 상황에 대한 대처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굳이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도 장애인이 충분히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안전하고 편리한 시스템이 완비된 사회가 더 좋은 사회라고 믿는다.

유마의 엄마가 보이는 과잉보호와 간섭이 내겐 마치 이 영화의 첫 장면이 보여주는 지하철 승하차 서비스와 닮아 보였다. 유마와 성매매 남성의 자선적(?) 애무 장면이 몹시 불편했던 이유도 투철한(?) 서비스 정신으로 임하는 그 태도에 있었다. 마치 다 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엔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지 않은가.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자율! 그 첫 장면을 감동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다시 본다면 이 영화가 새롭게 보이지 않을까.

“37초, 내가 태어나서 숨 쉬지 못한 시간이다. 만약 1초라도 빨리 내가 숨 쉬었다면 지금보다 자유로워졌을까? 하지만 언니인 유카가 아니라 나라서 다행이다.”

언니 유카를 만나고 나서 유마의 독백이다. 유마와 유카의 삶을 가른 순간, 유마를 유마이게 만든 37초! 유마의 이 독백은 과연 진정한 자기 긍정일까, 아니면 자기 체념일까. 이 역시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유마를 유마이게 만든 순간, 37초.

당신을 비로소 당신이게 만든 그 순간은 언제인가.

[더인디고 THE INDIGO]

라디오 방송과 칼럼을 쓰고 인권 강의를 하면서 나름의 목소리로 세상에 말을 걸어왔습니다. ‘easy like Sunday morning...’ 이 노래 가사처럼 기왕이면 일요일 아침처럼 편안하게 문화를 통한 장애 이야기로 말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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