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다 잘 할 필요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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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더인디고=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요즘 우리 아파트는 노후 수도관 교체 공사가 진행 중이다. 그래서 큰 폭발 소리가 나기도 하고 매일 다니던 길이 파헤쳐져 있기도 한다. 조금 불편한 일이 생기기는 하지만 길을 다니거나 집안에서 생활하는 데 그리 큰 지장이 있는 건 아니어서 한 달 정도 되는 공사기간 동안 큰 어려움 없이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아침은 좀 달랐다. 매일 다니던 길에서 큰 중장비 소리가 들리고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길 전체를 막고 있는 기계들도 문제였지만 청각에 많은 부분 의지하며 걸어 다니는 나에게 그렇게 큰 소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한 손에는 우산을, 다른 한 손에는 지팡이를 어정쩡하게 들고 도움을 청할 곳이 없나 살펴봤지만 공사 소음에 묻혀서 그런지 사람 소리는 들리지가 않았다.

출근을 해야 하는데 길은 막혀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가만히 멈춰 서서 뭔가 긍정적인 변화가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없었다. 분명히 사람 한 명 정도는 지나갈 수 있는 틈이 있거나 어느 쪽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우회로 안내표시가 존재할 것이라는 추측은 되었지만 그렇다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 작은 가능성을 믿고 위험한 전진을 할 수는 없었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지고 있던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 때, 어떤 투박한 손이 드디어 나에게 구원의 길을 안내해 주었다. 공사를 하시던 분인지 지나던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분이 이끄는 길은 예상대로 조금만 돌아가면 되는 간단한 경로였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걸어가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장애를 가지고 사는 것은 적지 않은 순간 출근길에 갑자기 공사장을 마주하는 것 같은 경험들의 반복이다.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믿고 살아가지만 불현듯 마주하게 되는 불편한 상황은 무기력하게 멈춰 설 수밖에 없는 상황들을 만든다.

처음 보이지 않았을 때 친구들이 즐겨 하던 오락실의 게임이나 운동장의 공놀이가 그랬고 어느 정도 자랐을 때는 능숙하게 운전하던 또래들의 모습이 그랬다. 여러 사람이 함께 간 식당에서 고기를 맛있게 구워주는 매너를 발휘하는 것도 갑작스레 아파하는 친구를 위해 얼른 달려가서 구급약 한 알을 사 오는 것도 내겐 꼭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는 벽으로 느껴졌었다.

직장을 구하고 사람을 만날 때도 인생의 공사장은 언제나 나타났지만 생각해 보면 그건 불편하고 만족스럽지 않은 상황이었을 뿐 어떻게든 결론에 도달하는 잠깐의 문제들이었다. 때로는 복잡하고 낯선 길을 굳이 혼자 지팡이를 짚고 찾아가고, 유행하는 게임 소리를 외워 해 보기도 하고, 눈이 보이는 사람들만 할 수 있다는 스포츠에 억지로 도전해 보기도 했지만 꼭 그럴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얻어낸 성취들이 삶에 있어서 지속적인 에너지가 된다면 그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것이었겠지만 내게 있어서 매번 그렇지는 않았다. 살면서 받아드는 선택지는 정말 많지만 그것들을 모두 경험하고 잘 할 수는 없다. 내가 해야 할 것들은 그중 일부이고 잘 해야 하는 것은 그것보다도 훨씬 적다.

무력함 갖게 하는 불가능의 영역들은 대부분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다. 그래도 하고 싶다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난 공사장을 지나가야 하는 사람이었지만 꼭 혼자서 그걸 해낼 필요는 없었기에 잠시 멈춰 서 있었다고 우울할 필요는 없었다. 이름 모를 어떤 이의 도움을 받아서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지만 그런 이유로 하루쯤 출근을 못한다고 엄청난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운전을 못 하는 것도 친구들과 함께 게임하며 어울리지 못했던 것도 그 시간 나에겐 너무 큰 장애였지만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되었다. 지금 내가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꼭 하지 않아도 되었을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여러 가지 할 수 없는 것을 걸러내는 동안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잘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간다.

가지지 못하고 할 수 없어서 아쉬운 대부분은 가지지 않아도 되거나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다. 가질 수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해도 인생은 충분히 의미 있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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