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낯선 이가 건네준 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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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우산을 건내는 장면
비오는 날 우산을 건네주는 장면/ⓒunsplash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안승준 집필위원] 갑자기 쏟아지는 빗속을 우산도 없이 걸어가고 있을 때 낯선 이성이 문득 우산을 건네준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마침 비를 맞던 이는 혼기를 꽉꽉 채우다 못해 넘어가는 외로운 총각이고 우산을 건네주는 여성은 그와 딱 어울릴만한 또래라면 또 어떨까?

설렘! 떨림! 두근두근! 혹시나 하는 감정이 순간적이고 반사적으로 온몸을 휘감을 것이다. 상대가 나의 이상형에 얼마나 가까운지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주는 효과 덕으로 큰 의미가 없다. 단지 언젠가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과 그의 현재가 오버랩 되면서 머릿속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반짝반짝한 상상으로 채워질 것이다.

누구나 꿈꾸지만 누구에게나 일어나지는 않을 그런 기적이 가을의 한복판에 내게 일어났다. 바람까지 스산하던 며칠 전 저녁 지하철 출구를 나오고 있는데 제법 굵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역에서 집까지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으므로 빠른 걸음으로 퇴근길을 재촉하는 쪽을 택했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내 걸음보다 몇 배는 더 빠른 속도로 뒤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에게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소리는 점점 내 쪽을 향한다는 방향성이 분명해지고 있었지만 설마설마했다. 그러고는 정확히 내 옆에 서서 말을 걸었다.

“이 우산 받으세요.”

재차 사양하는 나에게 낯선 여성분은 급기야 “그럼 제가 씌워드릴 테니 집까지 같이 가셔요.”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그것마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현을 하던 나에게 그녀는 꽤 아쉬워하며 일행에게 돌아갔다.

그녀의 음성이나 말투가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잠깐 설레는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쓸데없이 두근거리는 내 마음 때문에 난 그 우산을 더 받아서는 안 되었다.

평생 한 번도 겪지 못할 이런 상황이 나에게는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그렇지만 장면의 형태가 어느 영화와 유사할 뿐 그 실제 내용은 아주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이 상상하는 우산 들고 달려온 여성의 마음은 맘에 드는 이를 향한 굉장한 용기의 표출이거나 자신도 모르게 표현된 수줍은 고백에 가까울 것이다.

단지 그 이유가 우산이 두 개였거나 태생적으로 착한 사람이어서 그랬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또래의 이성을 향한 것이라면 불필요하게 겪게 될 오해의 상황 때문에라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자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지만 그동안 내가 경험한 나에게 우산을 건네주는 이들의 마음은 순수성 100%의 측은지심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내게 이성적 매력을 느꼈으나 꿋꿋이 그리고 끝까지 감추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의 입장에서 느껴진 우산 주는 여자들의 마음은 그냥 모두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이웃을 향한 적극적 선행이었다.

비 오는 날 우연히 비 맞는 장애인을 만나고 딱한 마음을 느끼고 그에게 우산을 건네주는 것이 어느 부분에서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이들도 있겠다. 장애인 아닌 자신을 대입해 보면 답은 간단하다.

내가 시각장애인이 아니었다면 젊은 여성들이 아무런 부담 없이 낯선 남성인 나에게 그토록 열심히 달려와서 우산을 건네줄 수 있었을까? 만약 줄 수 있다고 한다면 그때의 마음 또한 단지 우산 없는 이에 대한 나눔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의의 기준이나 사회적 질서의 통념은 상대에 따라 변해서는 안 된다. 나에게 더 착하게 행동할 필요도 없지만 나 또한 내게 주어지는 특별한 선행을 원하지 않는다.

난 우산을 가지지 못할 만큼 어렵지도 않고 비를 맞는다고 갑자기 잘못될 만큼 위험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은 내게 있어서만큼은 전에 없던 의무와 용기 같은 것을 느끼는 듯하다. 그런 예외적 적극성의 표출은 적지 않은 시간 속에서 나 자신을 더 작아지게 하고 불편하게 만든다.

버스 손잡이를 안전하게 잘 잡고 서 있는 나를 어르신들이 빼곡하게 앉아계신 노약자석에 강제적으로 앉히려고 할 때는 고맙다는 마음보다는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익숙한 길을 안전하게 걸어가는 내 백팩 손잡이를 허락도 없이 뒤에서 잡아채고 방향 지시랍시고 이리저리 끌어당길 때는 뭔가 고삐에 묶인 짐승이 된 것 같아서 화가 치밀기도 한다.

내가 지팡이 들고 가던 시각장애인이 아니었다면 엄두도 못 낼 행동이었겠지만, 그 대상이 내가 되는 순간 그것은 친절이기에 강하게 거절하거나 화를 내지도 못한다. 그럴 때마다 난 그들의 본심은 선하게 출발한 것이라 최면을 걸면서 불쾌한 감정을 꾹꾹 눌러야만 한다.

낯선 장애인을 만난 이가 다른 낯선 이를 만났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예의를 갖추었으면 좋겠다. 하루에 만나는 수많은 사람 중 누구에게도 우리는 강제로 잡아끌거나 앉히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내게도 그랬으면 좋겠다.

또 어떤 비가 오는 날 내게 우산을 씌워주고 싶은 여성이 있다면 내게 이성적 매력을 느꼈을 때만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기를 바란다. 장애인이기에 도울 필요도 없지만, 장애인이라서 마음대로 도움을 베풀 권리도 없다. [더인디고 THE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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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윤
3 years ago

필자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감정 또한 충분히 이해 하지는 못한다 해도 꼭 그렇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선의의 마음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도 되지 않을까요?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좋은 사람도 많이 있답니다!
‘힘 내시고, 응원합니다’
이 말 또한 조심스럽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