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잡썰] 그까짓 공놀이가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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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경기는 다른 종목과는 달리 선수들 각자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의 눈높이에서 보게 되는 경기의 흐름과 승리의 값을 공감해야 승리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공감은 홈에서 홈으로 되돌아와야 하는 야구의 특별한 득점 방식과도 연결된다. ⓒ픽사베이
▲야구 경기는 다른 종목과는 달리 선수들 각자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의 눈높이에서 보게 되는 경기의 흐름과 승리의 값을 공감해야 승리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공감은 홈에서 홈으로 되돌아와야 하는 야구의 특별한 득점 방식과도 연결된다. ⓒ픽사베이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더인디고 편집장

9회 말이다. 4 대 2로 앞선 상황에서 마지막 이닝을 막기 위해 마운드의 올라선 투수는 이미 지쳐있다. 지난 경기들에서 선발이 일찍 무너지는 바람에 연투를 감행해 투구 수가 지나치게 많았던 탓이다. 하지만 지친 내색을 할 수는 없다. 팀은 승리를 위해 존재하고 자신은 팀원들과 팬들이 공감하는 승리를 지켜야 하는 숙명을 짊어져야 하는 클로저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타자에게 볼넷을 내준 후에도 투수는 개의치 않았다. 두 점을 앞선 상황이고 아웃카운트와 점수를 맞바꾼다고 해도 그리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다음 타자에게 안타를 내주고 주자 1-3루가 되고서야 어쩌면 역전을 내줄 수 있겠다는 불길감에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자 상대팀은 노회한 타자를 대타로 내세웠다. 큰 것 한 방을 때릴 줄 아는 베테랑 선수다.

등줄기를 타고 진땀이 흘러내렸고, 로진백으로도 손바닥을 적시는 땀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첫 투구를 하기 전 투수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모자챙을 더듬는 투수의 손끝이 떨렸다. 투수는 주자가 있음에도 와인드업 자세로 초구를 던졌다. 스트라이크존 한복판을 찌르는 143km짜리 속구다. 타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꼿꼿하게 선 채 지켜볼 뿐이었다. 포수에게 공을 되받은 투수는 잠시 생각했다. 대체 어떤 공을 기다리고 있을까… 투수의 손가락이 공의 실밥을 쉴새없이 더듬었다. 공은 또다시 스트라이크존 한복판이다. 이번에는 기다렸다는 듯 타자의 배트가 따라 나왔고 공의 밑둥을 깎듯 빗겨쳤다. 역시 속구였고 타이밍이 늦어 파울 되었다. 투 스트라이크.

이제 볼카운트에서 투수가 훨씬 유리해졌다. 투수가 던질 수 있는 경우의 수는 한결 많아졌다. 반면 타자는 맘껏 배트를 휘둘러 장타를 쳐낼 수 있는 기회가 적어진 셈이다. 투수는 홈플레이트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 낙차가 큰 커브나 포크볼로 헛스윙을 유도하거나 낮게 던져 땅볼을 치게 해 더블플레이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으로 투수는 또다시 속구를 선택했다. 투수가 던진 공이 홈플레이트를 지나는 순간 타자의 배트 끝이 반원을 그리며 날아오는 공을 휘감았다. 관중들의 환호와 경쾌한 타구음이 귓전에 울렸다. 까마득히 검은 허공을 향해 날아오르는 공은 마침내, 왼쪽 담장을 훌쩍 넘어가 환호하는 관중들 사이로 가뭇없이 사라졌다. 역전 홈런이다.

야구는 투수에게 전적으로 유리한 경기다. 투수는 온 힘을 다해 공을 던져 세 개의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거나 타자가 공을 치도록 유도해 아웃을 시키면 된다. 반면 타자는 투수가 던지는 속구는 물론이고 다양한 변화구에도 대응해 타격해야 한다. 게다가 곳곳에 포진한 9명의 수비수가 잡을 수 없는 곳에 타구를 보내야 한다. 이러니 10번의 타격 기회에서 3번만 안타를 때려내도 잘 친다는 평가를 받는다. 참 불공평한 방식이다. 그런데 한 가지, 투수가 9회까지 27명의 모든 타자를 완벽하게 아웃 처리한다고 해도 승리의 조건을 만들 수는 없다. 투수가 아무리 잘 던져도 자신의 팀의 점수는 ‘0’이다. 스스로 이길 수 없는 경기에 나서야 하는 투수에게는 가혹하지만, 절대적으로 불리하지만 점수를 내고 승리에 기여할 수 있는 타자 입장에서는 되려 공정한 룰이 성립되는 셈이다.

결국 팀의 승리를 위해서는 선수들 각자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무엇보다도 각자의 눈높이에서 달리 보이는 경기의 흐름과 나눠 갖는 승리의 값에 공감하지 않으면 온전한 승리는 언감생심이다. 이러한 공감은 홈에서 홈으로 되돌아와야 하는 야구의 특별한 득점 방식과도 연결된다. 모든 구기 종목들은 상대편 골대에 공을 던져넣거나 떨어뜨려야 점수를 얻는 소위 ‘점령’이라는 전쟁 개념의 득점 방식이지만, 야구는 되려 각 개인의 능력들을 모아 서로를 집으로 되돌아오게 해야 점수를 인정하는 방식이다. 오죽하면 공을 경기장 밖으로 넘겨 얻는 점수 명칭도 홈런(Home run)일까? 서로 다른 위치와 능력의 격차 속에서도 한 점을 내기 위해서는 상황과 경기의 흐름에 공감할 수 있어야 비로소 승리가 가능하다. 이러니 모두 승리를 향한 팀 구성원들의 공감이 없으면 경기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사람들은 ‘공감’이 타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타인의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런 탓에 공감을 도덕, 친절, 연민과 동의어처럼 사용하거나 타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루어 이해하는 이타적 행위라고도 여긴다. 하지만 착각이다. 공감은 ‘우리편’만이 믿는 것에 대한 편애이며 스포트라이트다. 강렬한 스포라이트 밖을 볼 수 없도록 공감하지 않으려는 것들을 어둠에 감추려는 행위가 공감인 셈이다. 그래서 공감은 ‘우리’와 공감하지 않거나 공감할 수 없는 ‘타인들’에게 야구경기의 빈볼처럼 무차별 공격을 해도 되는 명분이 되기도 한다. ‘우리편’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지지는 공감을 통해 확장되어 마침내 편향적 사고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전의 사회보다 도덕적 진보가 이뤄진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한 역사 과정은 우리가 그 시대 사람들보다 타인에게 공감을 더 잘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삶이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삶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한 때문은 아닐까? 타인의 삶을 우리에게 투영하지 않고, 우리가 바라는 모습을 타인들의 삶에 덧씌우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편’을 찾아 공감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세상이 도리어 도덕적 진보가 이뤄지는 자유로운 공간이 될 것이다.

그날 나는, 응원팀이 9회 말 역전 끝내기 홈런으로 패하자 분하고 억울해 위경련에 걸려 3일을 끙끙 앓아야 했다. 부자 구단과 가난한 구단과의 경기, 꼴찌가 될 것이라는 세간의 예상을 뒤엎었던 전복(顚覆) 시간은 마침내 끝났다. 2위를 차지한 응원팀 선수들과 환호했지만 단 한 방의 역전 홈런으로 끝장난 패배에 공감할 수 없었던 나는 응원팀이 졌다고 배앓이까지 하는 쫄보라는 지인들의 놀림을 당분간 감수해야 할 듯하다. 그까짓 공놀이가 뭐라고…

[더인디고 yslee506@naver.com]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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