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영의 오늘] 반갑다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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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 함께 즐거워하고 있다. ⓒ픽사베이
▲친구들이 함께 즐거워하고 있다. ⓒ픽사베이

[더인디고=조미영 집필위원]

조미영 집필위원
조미영 더인디고 집필위원

가난이 고만고만하던 1970년대 중반,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유독 더 못 사는 집의 딸이었던 나는 그래도 기죽지 않고 공부와 노는 일에 열심이었다. 학급의 회장이나 부회장은 우리 집의 금기였다. 돈 많이 든다고 엄마는 절대 하지 말라고 언니들을 다그치는 걸 보며 자랐다. 초2 때는 내가 후보로 지명되었을 때 손을 번쩍 들고 ‘선생님, 저희 엄마가 회장 하면 돈 많이 든다고 못하게 했어요’라며 미리 포기했다. 담임이 가정방문을 와서 그 얘길 하며 엄마와 크게 웃던 모습이 이제는 많이 희미해졌다.

하지만 5학년 담임은 회장 후보 안 하겠다고 말했는데도 칠판에 이름을 적었다. 덜컥 회장으로 당선되고서야 ‘너는 집안이 어려우니 부회장과 바꾸라’고 했다. 찢어진 커튼도 교체해야 하고 학교 행사 때 회장 엄마가 할 일이 많은데 가정 형편 어려운 우리 엄마는 못 할 거라 했다. 처음부터 내 의견을 무시하고 억지로 시키더니 결국 어린 내가 가난은 부끄러운 걸로 생각하게 했다.

그래 놓고는 내게 미안했던지 별일 아닌 일에 자주 칭찬했다. 칭찬이 반갑지 않았고 학교 가는 게 싫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담임이 내게 준 상처는, 내가 어른이 되면 절대로 아이 마음 다치게 하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게 했다.

그렇게 불편한 학교생활이 재미가 없던 차, 단발머리 찰랑거리며 빼빼 마른 아이가 전학을 왔다. 입성으로 보아 평범한 것 같았는데 그 아이 아빠가 시청 공무원이라 했다. 담임의 관심을 받는 그 아이가 부럽진 않았지만 같은 학교 5년을 다녀서 대부분 잘 아는 다른 애들보다는 그래도 자꾸 눈길이 갔다. 담임은 내게 새로 온 친구와 친하게 지내라며 내 옆자리에 앉게 했다. 학교에 대한 질문에 서로 말을 좀 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단짝이 되어 있었다.

딸만 넷이던 그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나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부러웠다. 판자촌의 우리 집과 결이 다른 2층 양옥에 처음 들어가 본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우리 동네 공중화장실에 열 댓 가구가 사용하는 화장실이 항상 불편했는데 집 안에 있는 두 개의 화장실은 마냥 신기했다. 식구마다 자신들의 공간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부러움이었다.

중학교를 서로 다른 곳으로 진학했고 고교는 나는 실업고를, 친구는 인문고로 가면서 서로의 진로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친구는 대학생이 되었고 나는 직장인이 되었다. 서로 뜸하게 지내던 차, 우연히 남포동에서 친구의 남자친구를 보고 깜짝 놀랐다. TV에서나 볼 수 있는 조각미남이었다. 남자친구에게 맞추려고 그랬는지 그리 예쁜 얼굴이 아니었던 친구는 쌍꺼풀수술을 했는데 어색했지만 예쁘다고 말해줬다. 우리 집에 놀러 온 날, 눈치 없는 엄마는 친구를 막 혼냈던 게 어렴풋이 생각난다.

“아이고, 숭악해라! 넌 왜 가만있는 눈을 후벼서 그리 이상하게 하고 댕기노?”

나는 엄마의 말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고 친구는 무안해서 얼굴이 발개진 후 우리 집에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대학생과 직장인의 만남은 공통 소재가 많지 않았다. 칸트를 얘기하는 친구에게 온라인 은행업무를 말하는 나는 친구가 말한 책을 사서 읽기도 했지만 언제나 나의 학문적 소양은 빈곤했다. 간간히 전화로만 소통하고 만나는 일은 점점 줄었다. 시집살이하던 그 친구 집에 한 번 간 기억이 있다. 신혼여행 때 택시기사가 사진을 찍어 줬는데 전부 새까맣게 나와서 망했다며 안타까워하던 그 친구를 본 게 마지막이었다.

90년 초에 내가 서울로 오면서 부산의 모든 친구와 소식이 끊겼다. 직장 동료들과는 간헐적으로 연락을 했지만 둘째 아이가 자폐 진단을 받고 나는 퇴직 후 아들에게 매달리느라 내 삶에 친구는 깡그리 사라졌다. 살면서 가끔 그 친구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찾으려고 한 적은 없었다.

넷째 언니가 결혼한 사람은 초3 때의 내 짝꿍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 동창들을 언니는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지냈다.

며칠 전 나를 찾는다는 동창의 연락을 받은 언니가 그 친구의 연락처를 건네줬다.

“여보세요?… 저…”

“아, 미영이구나. 그래 나 혜인이. 좀전에 인수가 너 찾았다고 연락처 줬대서 낯선 번호 보고 바로 너구나 생각했다.”

어쩌면 예전의 그 목소리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지 너무 반가워 나는 자꾸 목이 메었다. 서로의 자녀들 얘기며 자신이 기억하는 에피소드를 말하면서 한참을 웃었다. 친구는 교사 생활 청산한 지 1년 지났고 나는 16년 직장생활을 끝내고 계속 자폐인 아들 그림자로 산다고 말했다.

“그랬구나, 엄마 역할 충실히 하려고 직장을 관뒀구나…”

무덤덤한 친구의 반응이 신선했다. ‘아이고, 네가 고생 많았구나. 그리 힘들게 사느라 욕봤다’고 호들갑스럽게 쯧쯧 혀를 차며 안타까움을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친구는 달랐다. 덤덤한 반응이 고마웠다.

내 남편을 결혼 전 본 적이 있다며 안부를 물었고 나도 친구의 남편에 대해 물었다.

“너 남편 되게 잘생겼던 거 기억난다 얘, 나이 들어도 그 미모는 여전하지?”

잠시 침묵이 흘렀고 순간 나는 이혼이라도 했나 싶어 긴장했다.

“어…미영아…남편이 지난 2월에 심정지로 하늘나라 갔어.”

“뭐? 아이고, 우째 그런 일이!!”

깜짝 놀란 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흥분했다. 혼자 사는 친구의 외로움이 바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자폐아들 고백한 나의 말에 보였던 친구의 반응에 비해 나는 과하게 오버하고 있음을 알고 안절부절못했다.

“나 아직도 남편 보낸 게 실감이 안 나. 남편 말만 나와도 숨쉬기가 곤란해서 힘드니까 우리 다음에 또 통화하자.”

친구는 전화를 끊었고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별로 혼자 사는 지인들의 얼굴이 하나씩 보였다. 마음이 안 맞아 이혼한 부부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교류가 있지만 사별은 얼마나 힘들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환갑의 나이에 생을 달리 하다니 황망했을 친구가 아른거려 우울했다.

남편 보낸 지 3년 되었다는 지인은 아직도 주방에서 음식을 하다 돌아보면 안방에서 남편이 나오는 상상에 괴롭다고 했다. 그 심정이 어떨지 충분히 공감은 되지만 당사자의 마음을 다 안다고 할 순 없는 일이다.

친구 부부의 삶이 어땠는지 채 알기도 전에 사별을 알아버린 나는 친구의 힘듦을 생각하며 저녁내내 마음이 아팠다.

초등 5학년 아이의 우울했던 삶에 다가와 웃게 해주고 서로의 집을 오가며 즐거웠던 친구와 연락이 닿아 더없이 기쁘다. 내가 아들 얘기만 하면 눈물부터 솟구치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친구가 남편 얘기를 스스럼없이 하려면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그 시간에 과거의 그녀가 내게 했던 것처럼 이젠 내가 작은 역할이라도 해야겠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다시 통화하고 만나서 서로의 삶을 얘기하며 위로 받고 위로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한다.

[더인디고 THE INDIGO]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 행복을 나누면서 따뜻한 사회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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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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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ina@naver.com'
황숙현
9 months ago

잔잔한 이야기 속에 중요한 사유가 보입니다 작가님 멋져요^^♡

cooksyk@gmail.xn--com-2m7ll84fw2z'
cooksyk
9 months ago

그 어떤 주제도 진솔하고 재미난 이야기로 조분조분 풀어내는 선생님 친구분과의 우정 2탄이 궁금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