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영의 오늘] 아들 내보낼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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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모래 위에 서 있는 사람ⓒunsplash
▲갈색 모래 위에 서 있는 사람ⓒunsplash

[더인디고=조미영 집필위원]

조미영 집필위원
조미영 더인디고 집필위원

아침 준비를 하려고 주방으로 나갔다가 깜짝 놀랐다. 싱크대에 널브러져 있는 컵라면의 흔적에 ‘아니, 이 양반이 왜 분리수거도 안하구…’ 인상을 쓰며 주섬주섬 챙기다가 묘한 기분이 들어 다시 원위치로 놔뒀다. 라면 먹는 걸 내가 싫어하니 남편은 자신이 먹은 걸 내게 들키지 않으려고 분리수거는 깔끔하게 해놓는다. 젓가락 하나만 설거지통에 담겨 있는 걸 아주 가끔 보는데 이번엔 보란 듯이 모든 게 한자리에 있었다. 투박하게 뜯긴 수프 봉지는 내용물이 조금 남아 있었고 스티로폼 용기는 물이 담겨 있었지만 빨간 빛이 연해 보였다.

“자기야, 이거 자기가 먹은 거야?”

“어? 내 아닌데 그라믄 우리 아들?”

남편과 서로 마주 보며 ‘세상에 이런 일이’의 표정으로 웃었다. 종이를 잘게 찢어 똘똘 뭉친 후 집안 곳곳에 숨겨두는 걸 보면 손끝이 꽤 야문 것 같은데 과자 봉지 내밀며 따달라고 하는 아들은 20대 후반 자폐성 장애인이다. 그럴 때마다 먹고 싶으면 네가 하라고 외면해 왔다. 그걸 아들은 먹어도 된다는 승낙으로 알고 신나게 식탁 옆으로 가서는 가위로 봉투를 잘라 내용물을 먹곤 했다. 그런 아들이 컵라면을 직접 뜯어서 먹었다니 우리 부부는 그저 허허거리며 신기해했다.

“물을 끓여서 부어 먹은 거 같진 않어. 스티로폼 용기가 빨갛지 않거든?”

“젓가락이 없는 걸 보니 손으로 먹은 거 같네. 그냥 수프 뿌려서 생으로 먹었는갑다.”

나의 실수로 조금은 달라졌을 사건 현장을 보며 남편과 나는 여러 가지 추측을 했다.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 먹은 흔적만 봐왔던 우리는 뜻밖의 상황이 반가웠다. 스스로 해 먹은 아들의 흔적을 분석하며 그저 싱글벙글했다. 모두가 잠든 밤 혼자 야식을 챙겨 먹으며 아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야단맞을 걸 감수하고 먹었을 아들이 의외로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웃음기 있는 걸 인지하고는 거실로 나왔다. 나도 할 수 있다는 거만한 표정에 우린 또 웃으며 “너 어디 가서 굶어 죽진 않겠다, 얘” 말하고는 상황을 종료했다.

“아무튼 놀랍고 과연 강생이는 어디까지 뭘 할 수 있을까 의문을 주고 또 웃을 수 있었던 즐거운 아침이었다” 가족 대화방에 올린 남편의 글에 공감하며 아들이 새롭게 보인 날이었다.

다음 날 저녁, 오리고기 볶은 것이 조금 남아 전자레인지 속에 접시째 넣어 두었다. 아침에 발견한 싱크대에 예쁘게 놓여 있는 빈 접시와 포크를 보고 나는 또 기가 막혀 웃고 말았다. 분명히 전날 밤 11시경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는데 언제 나와서 먹었을까? 그보다 전자레인지를 열어볼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여기저기 뒤져 보았을 아들 모습이 아른거렸다. 찬 음식 먹지 말고 데워 먹을 수 있도록 전자레인지 사용법을 알려줘야겠다. 뭔가를 가르치려면 이미 낌새를 알아채고 외면하는 아들이 나는 익숙하다. 붙잡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는 말은 잔소리에 불과하다. 아들 앞에서 말보다 행동으로 은연중에 하는 것들을 아들은 보고 배우고 따라 한다. 왜 맨날 가르쳐도 모를까 신경전 벌이고 화까지 내곤 했던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자폐성 장애의 특성을 모르고 반복학습만 강요하며 살았다. 같은 말 되풀이 하며 가르치는 건 아들의 탠트럼(분노 발작)을 유발하니 뭐든 한 번 설명하고 보여주는 방식이 더 맞았다.

어려서부터 먹성이 좋고 식탐이 많았던 아들에게 밥을 조금씩 천천히 먹게 하려고 티스푼을 쥐여줬다. 그 작은 숟가락에 야무지게 밥을 올려서 떠먹는 모습은 딱했다. 옛 어른들은 자식 입에 음식 들어가는 걸 보면 흐뭇하다지만 살쪄서 더 아둔해 보이는 외모가 싫어서 나는 아들의 먹거리를 가급적 제한했다. 초등 1학년이 되었을 때는 반찬을 포크로 먹던 걸 뺏고 젓가락을 사용하게 했다. 젓가락 사용법을 익혀야 한다는 것보다 반찬을 불편하게 먹으면 좀 더 천천히 적게 먹을 거란 계산이 있었다. 아들은 늘 늙은 엄마보다 한발 앞서갔다. 이삼일 젓가락으로 반찬을 걸쳐 먹더니 나흘쯤 지나니 의젓하게 젓가락질을 잘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은 마음만 먹으면 곧잘 하는 아들이 그 마음먹는 게 오직 먹거리에만 국한되는 건 슬픈 일이었다. 비만이 비만을 부르는 일상이 지속되면서 그렇게 펄쩍펄쩍 뛰던 아들은 이제 뛰진 않아서 다행이지만 그나마 봐줄 만했던 얼굴이 금복주를 닮아가니 안타깝다.

얼마 지나지 않은 날 새벽 5시경,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서 거실로 나갔더니 아들은 밥을 차리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꺼낸 반찬과 밥솥의 식은 밥을 국도 없이 마른 밥을 먹고 있었다. “배고파서 일찍 깬 거야? 엄마 부르지 왜 찬밥을 먹고 있어?” 이거면 됐다는 표정으로 아들은 무덤덤하게 밥 먹는 일에 열중했다.

요즘 부쩍 주전부리보다 끼니를 찾아 먹는 아들의 변화를 보니 이제 우리가 헤어질 때가 된 것 같다. 사소하면서 손 많이 가는 집안일보다 먹는 게 가장 중요한 문제라 나와 함께 늙어가는 것만 생각했다. 먹거리 챙겨 먹은 일만으로 언감생심 꿈도 못꾸던 아들의 자립을 상상하면서 그것이 현실로 이뤄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설렌다. 분가한 딸처럼 한 달에 두어 번 만나서 더 애틋한 독립된 가구의 아들을 그려본다. 많은 부분이 불안하지만 해보고 싶다. 아니다 싶으면 다시 함께 살더라도 요즘같이 먹고 사는 일에 이렇게 열정적인 아들을 내보낼 결심만으로 삶이 달콤하게 느껴진다.

[더인디고 THE INDIGO]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 행복을 나누면서 따뜻한 사회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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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덕
5 months ago

자식이 부모를 성장시키죠!
자식을 통해 부족한 제모습이 투사될때의 부끄러움을 저도 기억합니다.
아이들의 성장하는 모습에 묻어나는 웃음도
삶을 힘들어하며 눈물 훔치는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을 쓸어내림도
그런 일상안에서 가족을 기억하고 사랑을 키워나가는것이 우리네 인생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