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집으로 온 점자형 선거공보물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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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자를 읽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에게 점자형 선거공보물은 무용지물이다.
점자를 읽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에게 점자형 선거공보물은 무용지물이다. ©박관찬 기자
  • ‘시각장애인=점자’이라는 인식이 주는 문제점
  • 시각장애인이라도 점자를 모르는 경우 많아
  • 시각장애의 특성에 맞는 선거공보물 제공 필요

[더인디고=박관찬 기자] 저시력 시각장애인 성우 씨(가명)는 외출하기 위해 집을 나서려다가 문 앞에 무언가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 택배가 온 걸로 생각하고 무심코 그것을 집어들고 내용을 확인한 그는 이내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두툼한 서류뭉치들이 가득 들어 있는 것처럼 꽤 무게가 있는 그것은 점자형 선거공보물이었다.

성우 씨는 “저는 시각장애인이지만 중도장애이면서 저시력이고 아직 점자를 배우지 않아서 점자를 모른다”면서 “이걸 받아도 제가 읽을 수 있는 건 각 책자의 제목으로 인쇄된 ‘큰 글자’ 뿐이고 나머지는 점자로만 되어 있어서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한다”고 답답함을 드러냈다. 성우 씨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문제의 점자형 선거공보물을 받아 개봉했다.

성우 씨의 말처럼 투표에 대한 안내, 각 정당의 후보 이름과 공약 등 타이틀에 해당되는 제목 정도만 큰 글씨로 인쇄되어 있고, 나머지는 온통 점자로만 인쇄되어 있다. 점자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문서의 ‘제목’만 있고 ‘내용’은 아무것도 없는 문서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성우 씨는 해당 점자형 선거공보물을 버린다고 했다.

점자는 글자 크기와 간격을 임의로 조절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선거공보물의 내용, 즉 각 정당 후보의 공약 내용 전체를 모두 담기가 어렵다. 점자형 선거공보물은 분량을 24면으로 제한하고 있다. 점자 용지 24면은 A4 10포인트 기준 7페이지에서 7페이지 반 정도의 분량(공백 없이 약 5,000자 정도)이다. 총선에 출마하는 각 정당 후보들의 이름과 공약을 점자 용지 24면에 담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따르는 분량이다. 그래서 점자형 선거공보물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점역사와 후보자의 협의를 통해 내용을 축약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자형 선거공보물 24면은 A4 24장처럼 두께가 가볍지 않다. 600~700페이지 분량의 두꺼운 전공서적 정도의 두께라고 해도 될 정도로 점자 용지는 A4 용지보다 두께가 두껍다.

▲성우 씨의 집으로 배송된 점자형 선거공보물. 전공서적 두께처럼 많은 점자용지들이 봉투에 가득 담겨 있다. ©박관찬 기자

어느 점자도서관에서 안내하고 있는 점자형 선거공보물의 제작비용은 1,000매 이하와 이상인 경우로 구분된다. 1,000매 이하인 경우에는 매당 980원(양면)인데, 1,000매 이상이면 점자점역비, 제판료, 지대, 인쇄료, 제본료, 한글인쇄비 등의 기준에 따라 별도 책정된다. 시각장애인의 인구 수가 1,000명을 넘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점자형 선거공보물의 제작비용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우 씨는 “우리나라는 ‘시각장애인=점자’라는 인식이 너무 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시각장애인의 알 권리나 참정권을 보장한다면서 점자형 선거공보물을 제공하면 끝인 줄 안다”라면서 “지난 21대 총선 때도 점자형 선거공보물이 와서 다음 총선 때는 이거(점자형 선거공보물) 말고 큰 글자로 된 선거공보물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또 이게 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선거법상 시각장애인의 알 권리, 참정권 보장을 위해 점자형 선거공보물은 반드시 제작해야 한다. 하지만 점자형 선거공보물이 ‘모든’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건 아니다. 시각장애인 중에도 점자를 읽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점자 대신 큰 글자로 된 선거공보물을 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시각장애인’으로 등록되어 있으면 무조건 그의 집으로 점자형 선거공보물이 발송되고 있는 것이다.

성우 씨는 “정말 시각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장하기 위함이라면 시각장애가 어떤 유형이 있고 그에 따라 어떤 형태의 선거공보물을 제공해야 하는지부터 정확히 파악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전하면서 “점자형 선거공보물을 제작한 사람의 수고로움을 생각하면 고마우면서도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아 아쉽고 마음이 무겁다”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더인디고 박관찬 기자 p306kc@naver.com]

시청각장애를 가지고 있고 대구대학에서 장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첼로를 연주하며 강연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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