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살아 있는 偶像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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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시의 외곽 산중턱에 가까스로 자리한 <가나안>의 밤은 일찍 찾아들곤 했슴다. 고대 봉분만한 야산 기슭을 깎아 앉은 <가나안>은 이름만큼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이루어진 안식처는 아니었슴다. 그저, 이중의 불행으로 고통 받는 어린 양들을 거둔, 원장인 민(閔)목사의 인간애와 동정으로 일궈진 탁란(託卵)의 둥지일 뿐입죠. 우리는 어떠한 삶의 희망도 갖지 못할 만큼 옹색한 <가나안>의 살림살이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죠.

목재 전신주에 칠해진 타르를 벗겨 껌 대신 씹던 우리는 잃어버린 희망의 보상으로 최소의 호구로 굶주림만을 면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과, 언젠가 있을 하나님의 단죄에서 누락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유일한 희망이었슴다. 그렇기에 당신에게서 비롯된 일방적인 폭력과 차별은 우리에겐 더욱 커다란 외상을 안겨 주었던 것임다. 당신의 지나치리만큼 유별난 결벽증에도 우리의 상대적인 피해의식이 숨겨 있었슴다. 사물함 위에 놓인 똑같은 생김새의 연필통과 정해진 개수의 필기구는 당신의 꼼꼼한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냈죠.

그날 밤은 왜 그리도 춥던지……

허름한 저고리 앞섶으로 파고드는 매서운 찬바람을 견디면서 우린 볭문이를 찾아 나섰슴다. 얼마를 헤맨 끝에 다행시럽게 겨우 본관 옥상 구석에 앉아 있는 녀석을 만날 수 있었슴다. 울었는지, 볭문이의 눈그늘에는 눈물의 흔적이 아직 마르지 않은 채 번들거리고 있었슴다. 이 놈은 당신이 그를 찾았던 일이며 뺨을 얻어맞은 일, 그리고 쌩고들의 집합명령에 이르기까지 소상하게 그러면서도 간간이 억울한 손찌검에 대한 불만을 볼멘소리로 늘어놓았슴다. 그러자 볭문이는 소리쳤죠.

“그 새끼는 미친 거야. 정말 미쳤다고…….”

볭문이의 음울한 목소리와는 달리 두 눈에는 예사롭지 않은 살의와 곧 닥쳐올 무서운 보복을 짐작하고 미리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체념이 동시에 엇갈리고 있는 듯했슴다.

볭문이의 단언대로 어쩌면 그 당시의 당신은 미쳤는지도 모름다. 그게 사실이라면 당신의 광증은 이놈도 쉽게 눈치챌 수 있었응께요. 성적이 부진한 쌩고들에게 당신은 입버릇처럼 이 시대에서 최고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채찍과 당근을 적절하게 구사하며 강요하였죠. 아, 물론 이런 단편적인 일화들로만 미루어보자면 같은 처지의 연장자다운 걱정이 분명했겠습죠. 그러나 당신의 형님다운 충고는 항상 말씀이 몇 마디로 끝을 맺은 적이 읎었던 것임다. 공부를 게을리한 대가라고 자위하기에는 당신의 그 ‘사랑의 매’는 오히려 구타에 가까웠슴다. 그렇기에 얻어터진 후에는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해보겠다는 결기보다는 억울하게 맞았다는 찜찜한 고통만이 감정을 어지럽혔던 것임다.
집요한 주장질이 계속되는 동안 당신의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과 알아들을 수조차 읎는 중얼거림, 그리고 마음 속에 품은 음모를 은닉하려면 어쩔 수 읎는 드러나는 무표정은 우리를 거의 실신시키기에 충분했던 조건들이었슴다. 그리고 사정읎는 매질로 곤죽이 된 우리를 붙들고 급기야 시작되는 참회의 눈물은 분명 아우들을 위한 애절한 하소연이었습죠. 그렇지만 당신이 주절주절 뱉어내는 쓸쓸한 기억의 일화들은 우리에게는 이미 소용읎고 귀찮은 신파에 지나지 않았슴다.

“미안하구나, 나를 용서해다오. 내가 왜 너희들을……. 불쌍한 너희들을 때렸을까. 난 이런 내가 미워서 견딜 수가 읎단다. 모두 엄마 때문이야, 엄마는 나를 싫어했지. 언젠가 나를 죽이려고 잠든 내 목을 졸랐어. 정말이야.”

그날 당신이 화가 난 이유는 그리 오래지 않아 밝혀졌슴다. 헌데, 그 이유란 게 참으로 묘하더군입죠. 성적을 조작하기도 전에 볭문이가 성적표를 원장님에게 갖다드렸다는 거였슴다.

당시의 <가나안>은 캐나다의 한 기독교 단체의 원조읎이는 도저히 운영할 수 읎었슴다. 그래서 쌩고들은 누구나 중학을 졸업하면 누구나 예외읎이 직업훈련을 받아야만 했슴다. 직업훈련소에서 한 해 동안 고장난 시계의 깨알 같은 부품들을 만지작거리거나 땜납 냄새로 인한 습관성 두통에 어지간히 이력이 붙을 때면 이 공장, 저 공장으로 일반 노동자의 절반도 안되는 임금을 약속 받고 팔려 가는 것이 고작이었습죠. 그렇게 소위 독립을 하게 되면 평생 동안 자신의 희망이니, 미래에의 꿈조차 사치스럽게 여기면서 사는 것이 상례였으며, <가나안>의 불가피한 원생들의 독립방안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명석하고 남다른 지식에의 욕구는 한 번도 어그러짐이 읎었던 관례를 결코 용납할 수 읎었던 것임다. 당신은 매우 우수한 성적을 방패로 원장님을 설득하여 고등학교에까지 진학했던 것임다. 원장님은 당신의 거칠 줄 모르는 향학열을 우려하면서도 매 학기마다 안겨주는 우등상장에 매우 흡족해 하였던 기억이 나는구만요. 그렇기에 대학 공부도 하고 싶다던 당신의 바람에 원장님은 고등학교 3년 동안 전교 석차 5위권 유지라는 조건으로 허락했던 것일테구요. 그야말로 <가나안>이 문을 연 이래 최대의 특권이 약속되었던 셈이었죠. 그래서 당신은 밤낮읎이 코피가 터지도록 공부에 전념했었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쩌다가 5위권 밖으로 밀려나면 당신은 서슴읎이 성적표의 석차란을 교묘히 조작했었고, 우린 그런 당신의 영악한 속임수를 치열한 노력의 대가로 여기고 침묵으로 동조했었슴다.
이미 예비고사를 치른 후에 그런 사단이 일어났으니 당신의 심경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되는 구만요. 아, 그렇다고 해서 차볭문의 행위를 방정맞은 시샘으로 매도하지는 마십쇼. 정히 당신이 그런 쓸데읎는 책임전가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신다면 성미란이라는 계집아이를 기억하고 계시는지 묻고 싶구만요. 이 놈과 동창이었으니 당신보다는 다섯 살 정도 어리겠구만요. 그녀도 역시 고아였슴다.

우리 쌩고들은 너 나 할 것 읎이 자신의 확실한 나이를 알지 못했슴다. 비릿한 젖맛에 미련이 많은 나이에 부모에게 버려진 때문입죠. 그래서 민원장은 몸무게와 치아의 발육의 갯수로 나이를 가늠했답디다. 제법 과학적인 방법이긴 혔지만, 아무래도 우리는 실제의 연령보다 두어 살 정도 군 나이를 더 먹거나 그만큼 세월을 깎인 채 호적에 오르게 되었죠. 후에 용케 운이 좋아 부모를 찾은 아이들의 경우처럼 말입죠. 당신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겠죠.

볭문이와 미란이 그리고 이 놈까지, 이렇게 셋은 당시의 중학 2학년생에게는 어림도 읎던 신체의 변이를 겪고 있었슴다. 뭐랄까…… 가끔 공동 목욕실에서나 볼 수 있었던 볭문이의 샅에 제법 마춤하게 자리잡은 거웃이나, 또래 계집애들 중에서 가장 도드라지게 봉긋한 미란이의 젖통에서 쉽게 짐작되던 자연스런 성숙 말임다.

아무튼 미란이와 볭문이는 무척 다정한 사이였습죠. 그녀는 항상 볭문이의 의젓한 누이행세를 했으며, 볭문이 역시 그녀의 그런 어줍잖은 짓을 아니꼽게 여기기는커녕 도리어 말 잘 듣는 남동생처럼 굴었습죠. 아이들의 짓궂은 놀림질에도 미란이는 웃음으로 눙쳐 넘기는 여유를 보일 줄 알았고, 볭문이 역시 특유의 과묵한 표정으로 묵살하기 일쑤였슴다. 어린 것들의 놀림질이란 게 상대의 민감한 대꾸가 읎으면 금새 시들해지는 법이어서 언제부터인가 그네들은 아이들의 놀림감조차 되지못했을 정도였슴다. 그때는 같은 고아원 출신이란 이유로도 그네들의 친숙한 관계를 설명할 수 있었슴다만, 이제야 비로소 이 놈은 더욱 절실한 감정이 그네들 사이에 전류처럼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겠더구만요. 그 감정이 아마도 볭문이의 죽음에 대한 정직한 해답일 수도 있겠구요. 미란이는 그리 잘난 용모를 지닌 편은 못됐지만, 곱상한 생김새와 깔끔한 성격 탓으로 우리 사이에서는 제법 손꼽히는 계집애 중에 한 명이었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볭문이에게만 친절을 베풀었으며, 애교 섞인 장난질로 호감을 끌려는 아이들에겐 지나지리만큼 심하게 패악을 떨곤 했었습죠.

어느 해 여름에 당신은 엎어놓은 공기그릇만한 미란이의 젖통에 호기심이 잔뜩 동했던 일을 이 놈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습죠. 기억나십니꺼?

“내가 식당 청소상태를 점검하려고 식당 문을 막 들어섰을 때였어. 허리를 굽혀 식탁을 행주로 훔치던 미란이의 허름하게 늘어진 옷섶 사이로 둥그런 젖이 뵈는 거야. 눈이 확 떠질 만큼 예쁜 젖이었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한 번 만져보고 싶을 만큼 예쁘게 생긴 젖이었다고. 정말 신기해. 그런 사나운 계집애 가슴에 보름달 같은 젖이 달려있다는 게…….”

그런 말을 이 놈에게 서슴읎이 지껄이던 당신의 눈빛은 점점 이상한 열기에 휩싸여 붉게 물들고 있었죠.

“난, 난 말야 분명히 봤었다구. 왁살스럽게 내 목에 휘감긴 엄마의 손아귀의 저 끝, 그러니까 가슴팍에도 똑같이 생긴 피부돌기가 있을 말이야. 그런데 그 여자의 젖통은 한 쪽 밖에 읎었어. 이상하지? 넌 그 여자의 젖통이 어째서 한 쪽인 줄 알고 있니? 모르지? 끽끽… 난 알고 있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거든. 끽끽…”

학교 친구들의 젖비린내 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담 듣기를 곧잘 즐기던 볭문이가 들려줬던 어머니의 달콤한 젖내와는 너무도 판이했던,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한 어머니상(像)이었슴다.

그런데 말임다. 볭문이와 미란이 사이에 별안간 틈이 생기기 시작했습죠. 볭문이는 예의 그 무관심하고 따분한 표정으로 자신의 틀어진 심사를 감추려고 했지만 일기장 모퉁이에 무수하게 휘갈겨 쓴 미란이의 이름에는 깊은 시름이 이 놈의 눈에도 보일 만큼 확연하게 드러나 있었슴다. 그리고는 공교롭게도 당신의 이름 뒤에 ‘개새끼 죽일 테다’라고 적혀 있는 것도 이 놈은 똑똑히 보고 말았슴다.

아, 괜찮아요. 배고프지 않슴다. 이 놈이 감히 당신에게 푸짐한 저녁식사를 대접받는 것도 세월만이 줄 수 있는 황감한 호의겠지만서도 어쩐지 진수성찬도 제대로 목구멍으로 넘어갈 것 같지 않구만요. 이 놈의 이런 착찹한 심정을 아량 넓은 당신은 능히 이해해 주리라 여기고 주제넘게도 사양해야겠슴다.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승인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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