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낮은 시선으로부터] 9호실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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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사용 장애인이 공원을 산책하다
ⓒPixabay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위원]

시설 경험의 두 가지 감정

집구석에 하릴없이 빈둥대고 있는데 어린 시절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잘 지내냐는 가볍고 짧은 안부 전화였는데도 녹슬고 늙었을 그 목소리가 더없이 정겹고 반갑다. 불과 5분 남짓 대화에도 우리는 타임머신을 탄 듯 40여 년을 훌쩍 뛰어넘어 어린 시절을 되짚으며 시시덕대며 함께 겪었던 기억의 갈피짬을 헤집었다.

이용석 편집위원
더인디고 편집위원

내게 시설에서의 10년은 폭력적 경험을 되알지게 했던 세월이기도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내 삶을 버티게 해 준 자양분이었던 고마운 시절이기도 하다. 당시 창궐했던 폴리오 바이러스(소아마비)에 걸려 일찌감치 양쪽 다리 마비장애를 갖게 된 나는 국민학교를 부모님에게 업혀 다녔다. 집에서 약 2km 남짓한 학교를 부모님 등에 업혀 등하교하는 일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부모님에게나 나에게는 곤혹스러웠는데, 특히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그 고역은 더해 차츰 당연한 듯 결석으로 이어졌다.

학교생활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할 만큼 곤란의 연속이었는데 교실에서 이동이 필요할 때면 마룻바닥을 기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신변처리가 가장 민망하고 난처했다. 당시 학교 화장실은 옥외 재래식이어서 기어서는 접근이 불가능했다. 아침에 속을 다 비우고 등교를 해도 집에 올 때까지 볼일을 보지 않을 도리가 없을 때가 태반이었지만 그저 참아내는 방법 외에는 도리가 없었고, 바지를 흥건히 적시기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다 서울에 있는 꽤 유명한 시설에 입소해 휠체어란 것도 처음 타보고, 내 마음대로 화장실을 들락거릴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더없는 자유로움을 느꼈으니 그 해방감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되려 집에서의 고립된 생활에서 시설에서의 자유를 얻었으니 요즘 장애계의 큰 이슈인 탈시설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던 셈이다.

한 방에 12명이 오글대며 기상부터 취침 때까지 정해진 틀과 지켜야 할 규칙들 때문에 숨이 막힐 듯 답답하고 강제로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 부당함에 억울했지만, 가끔은 규칙 따위쯤 무시하며 호기로운 일탈을 재미로 여기기도 했다. 당시 엄격한 금기 중 하나였던 무단외출도 감행했고, 어두운 밤을 틈타 한 그릇에 500원짜리 짜장면을 몰래 시켜 1분 안에 뚝딱 먹어 치우기도 했다. 그때는 왜 그리도 배가 고팠는지 식당에 남은 밥과 잔반을 서리해 또래들이 컴컴한 방안에 모여 허겁지겁 퍼먹기도 했다. 물론 이런 소소한 일탈들을 사감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눈에서 불이 번쩍 나도록 귀싸대기를 맞기도 했고 모진 매질을 당하기도 했으며, 강제퇴원을 시키겠다는 으름장에 며칠을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강제퇴원을 당하는 날에는 또다시 집에서의 고립된 시간을 보내야 했고 무엇보다도 더 먼 상급학교를 다닐 재간이 없으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렇게 나는 규칙과 일탈을 반복하며 시설에서 꼬박 10년을 생활했다. 그 10년 동안 3번의 수술을 했고, 1년 동안 재활치료를 받았으며, 양쪽 다리에 보조기를 착용하고 목발에 의지해 처음 두 다리로 섰다. 태어난 지 꼬박 15년 만에 지상에서 약 150cm 높이의 공기로 숨을 쉬는 경이로움이라니.

시설의 삶이 전부였던 사람들

당시 시설에는 재활병원이 있었는데, 병원 3층 9호실에는 최중증 장애인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더 이상 재활치료조차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고 대부분의 일과를 누워 지내는 와상장애인들이었다. 누군가 먹여주지 않으면 식사도 신변처리도 할 수 없었으며 의사소통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최중증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어서 간호조무사들의 조력이나 한 방에서 함께 생활하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그들 중에서 가끔 생각나는 분들이 있다. 장수 형과 봉덕이 형. 모두 와상장애인이었고 봉덕이 형은 언어장애까지 있어서 내게 도움을 청할 때마다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난감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소변을 받아주거나 원하는 TV 채널을 틀어주고 밥을 먹여주는 등 어린 나는 순번에 따라 도움을 주었고 그럴 때마다 봉덕이 형은 늘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살비듬이 버석거리는 바싹 마른 몸피와 서캐가 낀 두피, 곱아진 손을 겨우 꼬물대며 TV 화면을 가리킬 때의 왕방울만한 두 눈가에는 늘 물기로 흥건했다.

반면에 오른손을 제법 자유롭게 쓸 수 있었던 장수 형은 바퀴가 달린 침대에 누워 병동 어디든 돌아다녔다. 지나가는 누구든 불러세워 자신이 원하는 장소로 침대를 밀도록 했다. 늘 벽돌만 한 9볼트 배터리를 고무줄로 동여맨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머리맡에 두고 들었고, 책을 읽고 고리가 달린 막대로 침대 끝에 매달린 소변기를 능숙하게 들어올렸다. 어디서 돈이 났는지 가끔은 어린 우리에게 주전부리를 사주기도 했고, 하모니카를 능숙하게 연주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눈가도 항상 눈물로 젖어 수건으로 연신 닦아냈는데 그들의 젖은 눈이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탈시설은 봄맞이 소풍 가듯

서울에 있던 시설이 경기도 모처로 옮기고 9호실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누군가는 강원도의 다른 시설로 갔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충청도의 깊은 산골에 자리한 중증장애인들만 수용하는 곳으로 보내졌다고도 했다. 소문만 무성했고 그들의 소식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내 나이 50을 넘긴 마당이고 보면 그들은 고희를 훌쩍 넘긴 노인이 되었을 텐데, 살아있기는 한 건지 내심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평생을 시설에서 살았던 그들에게 당시에는 언감생심이었던 탈시설은 어떤 의미가 될까? 시설 밖의 생활이 잠깐의 모험 여행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면 그들은 기꺼이 시설을 박차고 나올 수 있을까? 그들에게 탈시설은 설렘보다는 두려움이었을 것이고, 안락보다는 위험을 선택해야 하는 무모함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감히 그들에게 간곡하게 권하고 싶다. 시설로 되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한 평도 채 되지 않는 비좁은 침대를 벗어나 세상을 정면으로 맞바라보고 사는 맛은 봐야 한다고. 비록 그 맛이 쓰더라도, 맵고 떫어도 그 맛조차 그들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온종일 천장만을 바라봐야 하는 삶, 갇힌 공간만을 타인의 일방적인 결정에 따라 맴돌이하는 대신에 깨지고 부서져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더라도 해바라기 나들이하듯 봄맞이 소풍 가듯 세상을 향해 성큼 나서도 된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들은 이제 없다. 도대체 9호실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더인디고 THE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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