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세상풍경] 역병의 시대, 가난한 자들에게 향하는 낙인과 차별 그 잔혹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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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
사진/ⓒ pixabay
  • 내 삶의 위치에서 보이는 열 가지 풍경, 셋

봄일까? 아니, 봄이어야 한다.

이용석 더인디고 편집위원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위원] 매년 우리는 이맘 때 쯤 으레 막 움트기 시작한 봄꽃을 새삼스러운 듯 구경하며 장난스럽게 꽃샘추위를 걱정했다. 그렇게 평화로운 봄에 익숙했던 우리는 지금, 역병(疫病)이라는 불청객이 봄보다 먼저 찾아와 둥지를 틀고 심술을 부리는 낯선 경험을 하고 있다. 한동안 그 불청객은 참 고약하게도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으며 심지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널뛰듯 날아다닌다는 흉흉한 소문으로만 존재하였다. 말 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역병이 돈다고 수군거렸고, 세상사에 무심한 사람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 시큰둥해 했다.

그러다 역병에 처음으로 감염된 사람이 중국인으로 밝혀지자 막연하고 어설펐던 우려는 삽시간에 살 떨리는 현실의 공포로 돌변했고, 자국민 보호와 바이러스 유입차단이라는 매우 그럴듯한 논리로 중국인 입국 금지 주장이 서슬 퍼렇게 난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신천지라는 종교모임을 통해 집단적 감염이 드러나자 한 달여 간 지속된 중국인 혐오는 특정 종교의 역병에 대한 몰이해와 집단적 행태에 대한 비난과 혐오로 진화하더니, 또다시 그들이 주로 활동했던 대구, 경북지역에 대한 ‘심리적 봉쇄’ 로 이어졌다.

우리사회의 역병에 대한 방역시스템은 과거 신종플루, 사스, 메르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병을 겪으면서 공공의료 시스템 중심으로 꽤 선진적으로 발전해 온 듯하다. 그렇다면 동시에 시민의식과 시민사회의 대응방식도 성숙해졌을까?

시시각각 확진자의 동선이 전 국민에게 노골적으로 알려지고 사람들은 그들의 길고 복잡한 활동반경을 민망할 정도로 자세하게 알게 되었고, 아는 만큼 그 비난의 강도도 거세다. 그들의 길고 지루한 동선에서 사람들은 어쩌면 그가 겪고 있을 삶의 고단함을 읽어내려 하지 않는다. 그저 부지런히 역병을 옮기는 슈퍼감염자로 낙인화하는 데 여념이 없을 뿐이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잔기침하는 것조차 불안한 눈총을 받는 일이 잦아지면서 우리는 역병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역병의 소문만으로 공포, 공황, 의심의 감정적 기복을 겪고 있는 중이다.

무엇보다 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판데믹 상황이 더욱 서글펐던 이유는 대구 한마음아파트 입주자들과 어느 콜센터 노동자들의 집단감염 소식과 활동지원사가 확진 판정을 받자 아무런 일상지원도 없이 홀로 자가격리 기간을 견디고 있다는 한 장애인 소식 때문이었다. ‘35살 이하 미혼 여성 근로자’만 입주 가능했다는 11평 그 옹색한 삶의 공간과,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은 콜센터의 열악한 노동 환경뿐만 아니라 재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배제되는 장애인들의 일상은 재난 역시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잔혹한 현실만 오롯하게 각인시킨다.

봄이다. 그럼에도 봄이다.

역병의 창궐에 효과적으로 대응한다는 의미는 자명하면서 간단하다. 역병에 감염된 모든 사람이 공공적 보호 시스템 안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하며, 가난이나 장애 따위의 사회적 낙인 때문에 시스템의 보호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보장받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전제는 따른다. 공공적 보호 시스템은 역병에 관련한 정보를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전달되어야 하며, 그 전달방식 또한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형식과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 어리다는 이유로, 앞을 볼 수 없거나 듣지 못하거나 글을 읽지 못하고 한국어를 모른다고 해도 공공적 보호 시스템은 당연하게 이들 모두에게 작동되어야 한다. 이렇듯 재난에 대응하는 공공성은 역병에 감염된 단 한 명이라도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의지이며, 그래서 투박하고 촌스러운 근대적 정신일 수밖에 없다.

지금, 겪는 봄은 우리 모두를 각각의 나이와 무관하게 노년의 삶을 경험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겪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자유로운 소비와 물리적 이동이 극도로 위축된 상태, 경제활동의 제한으로 한정된 자원과 소득만으로 역병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매일 매일을 견디는 삶이라니.

그렇다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이 불편한 공동의 경험 후에 우리사회는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 역병의 창궐은 느닷없이 겪는 재난일 테지만, 누구든 감염자가 되어 차별받고 배제될 수 있다는 그 불안과 공포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상에서 늘 겪어왔던 익숙한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황망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역병에 대응하고 배우며 또 꾸역꾸역 적응하면서 살아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은 어떠한 재난상황에서도 모든 사람의 존엄성이 인정되고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적 시스템,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다는 사회적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살만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평화로운 봄을 기다리며

자발적 자기격리를 위해 집으로 가는 길. 아트막한 둔덕 아래 무리를 이뤄 곱다랗게 피기 시작하는 목련꽃이 따뜻한 햇살의 결을 좇아 분분히 휘날린다. 여전히 역병의 기세는 꺾일 줄 모른다. 지금 겪는 이 상황이 끝난다고 해도 다시 또 몇 년 안에 새로운 역병의 창궐이 도래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따뜻한 봄이 반가운 이유는 추운 겨울이 있기 때문인 것처럼 부디 이 역병의 시대가 가난한 자들에게 향하는 낙인과 차별이 난무했던 잔혹한 기억으로만 남지 않길 바랄 뿐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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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2af5bc8ea43@example.com'

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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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is50@naver.com'
바람꽃 하늘 소망
4 years ago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psaboo71@hanmail.net'
순둥이
4 years ago

노년의 삶을 미리 경험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누군가의 돌봄이 있어야 하는 노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