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길을 건너면 많은 것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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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보도 시각장애인용 음향신호기 / 사진 = 픽사베이
횡단보도 시각장애인용 음향신호기 / 사진 = 픽사베이

[더인디고= 안승준 집필위원]  길에서 시각장애인을 만날 때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 중 하나는 보이지도 않는데 한 가닥 지팡이로 어떻게 길을 찾아다니는가이다. 지팡이에 특별한 기능이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시각장애인들은 다른 감각이 특별히 발달했다고 확신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론적으로 그런 것은 없다. 길을 찾는 것은 오로지 시각장애인 자신의 몫이고 그렇기에 난 전적으로 나의 훈련된 감각을 믿어야 한다.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똘똘해 보이는 안내견마저도 낯선 길을 사람처럼 알아서 척척 찾아주지는 못한다. 지팡이나 안내견이 해 줄 수 있는 역할은 장애물의 존재를 알려주거나 주변의 지형지물의 형태를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지 못한다.

마법 지팡이가 아닌 하얀 막대기로 혼자 다니기 위해서 시각장애인들은 학교나 복지관에서 ‘보행교육’ 이라는 것을 받는다. 사선이 아닌 앞으로 똑바로 걷기 위해 넓은 복도를 수백 수 천 번 왕복하기도 하고 기준을 잡아주는 지팡이의 위치가 몸의 중앙에 고정되도록 하기 위해 손목이 끊어질 정도로 제자리에서 지팡이를 움직이기도 한다. 언뜻 듣기엔 쉬워 보일 수도 있지만, 눈을 가리고 직선으로 똑바로 걷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앞만 보고 걷는다고 확신에 차서 걸어가지만 도착한 곳은 옆벽이고 방향을 바꿔 걸어서 다시 도착한 곳은 또 다른 옆벽이다. 이런 시행착오가 반복되다 보면 그리 넓지도 않은 실내공간에서도 완전히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길을 잃게 된다. 실제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인도 아닌 차도로 뛰어들 수도 있고 그보다 더 위험한 공사장 같은 곳으로 방향을 잡을 수도 있기 때문에 선생님들은 굉장히 엄한 목소리로 학생들을 훈련한다.

계단을 오르내리고 운동장도 돌아보고 학교 구석구석까지 익숙해질 때쯤 되면 교외로 나가게 된다. 운전을 배우는 사람들에 비교하면 도로 주행이나 운전 연수쯤 되겠다. 지팡이 짚고 낯선 세상으로 처음 혼자 나가게 되는 우리에게 선생님들은 슈퍼마켓에서 과자 사 오기, 시장에서 호떡 사 오기와 같은 소소한 과제를 내주고는 하셨다.

교문 밖에 나가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무서워하던 우리에게 선생님들은 세상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즐겁고 신나는 과제들이 많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버스도 타고 카페도 찾아다니면서 우리는 조금이나마 그런 의미를 알아서 그 무렵 ‘보행수업’도 졸업과 함께 끝났다.

그때부터는 수업이나 훈련이 아닌 진정한 생활로서의 독립보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운전 연수 몇 번 받았다고 바로 베스트 드라이버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몇 년의 지팡이 보행을 했지만 아무 조력자도 없는 공간에서 혼자 걷는 것은 학교 다닐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집 앞의 상점을 찾아가는 것도 걸어서 5분 거리의 지하철역을 가는 것도 보행을 배우던 첫날에 비길 만큼의 떨림을 동반했다. 분명히 있어야 할 곳에 계단은 나타나지 않았고 똑바로 걷고 있는 것 같은데 자꾸 가로수는 나를 끌어안았다. 골목도 건물도 나를 피해 도망 다닌다는 이상한 생각들이 머리를 채웠다. 역시 든든한 선생님이 뒤에 계시는 것과 실전은 천지 차이였다. 지나던 행인들의 도움으로 때로는 운이 좋아서 길을 찾아다니면서 조금씩 내게도 세상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건물도 골목도 제자리를 찾았고 가로수도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찾아갔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극복할 수 없었던 과제가 있었다. 바로 횡단보도였다. 차들도 멈춘 것 같고 사람들도 건너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두려움이 떨쳐지지가 않았다. 다음 신호를 기다리고 또 다음 신호를 기다리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야 겨우 길을 건넜다. 차가 멈추면 원래 하던 대로 직선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되었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차들이 달려올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한쪽으로 치우쳐 걸을 것만 같았다. 몇 미터 되지도 않는 길을 건너는데 남들보다 몇 배의 시간이 필요했고 받지 않아도 될 도움을 받느라 주변을 괴롭히기도 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한 어느 날 난 큰맘을 먹고 첫 번째 신호가 바뀌는 순간 길을 건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도 그렇게 했지만, 그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을 각오로 길을 건넜지만, 그것은 원래부터 그냥 길이었다. 길 건너에는 많은 것들이 있었다. 학교 다닐 때 맛있게 사 먹었던 호떡도 있었고 맥주 한잔 나눌 수 있는 호프집도 많았다. 친구의 집도 과일가게도 길을 건너고 나서 갈 수 있는 곳은 너무도 많아졌다.

요즘도 힘든 일을 마주할 때 가끔 어릴 적 보행수업을 떠올리곤 한다. 똑바로 걷지도 못하던 난 어느 틈에 학교 전체를 지팡이 없이도 걸을 만큼 커 갔고 넓은 세상으로도 조금씩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세상에 달콤함이 있다는 것은 세상으로 나왔을 때 비로소 알 수 있었고 길 건너의 맥주는 길을 건너야만 마실 수 있었다.

살다 보면 건너야 할 길을 마주할 때가 많다. 건너야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도 두려운 길들이다. 그래도 건너야 한다. 길을 건너야만 만날 수 있는 세상이 있기 때문이다. 길을 건너면 나의 세상도 그만큼 넓어진다. 그 길은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다. 난 오늘 또 다른 길을 건넌다.

[더인디고 THE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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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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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순
3 years ago

길을 건너는 삶이 오늘따라 새롭게 와닿습니다.

Admin
조성민
3 years ago
Reply to  유금순

어제 문득 길을 건너기 전에 횡단보도 앞에서 눈을 감아보니, 새삼 인생에서 건너야 할 횡단보도가 참 많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도 건너야 한다면 피하지 않겠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