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승리호’는 최고의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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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영화 '승리호'의 한 장면
넷플릭스 영화 '승리호'의 한 장면 ⓒ유튜브

[더인디고= 안승준 집필위원]  ‘차 마시고 영화 보고 식사하고… 영화 보고 식사하고 차 마시고… 식사하고 영화 보고 차 마시고…’ 어느 광고에선가 보았던 뻔하고 지겨운 데이트 코스 카피 문구이다. 대다수에게 그런 느낌을 준다는 건 또 다른 의미에서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접근성 좋은 콘텐츠일 수 있다. 직장인도 학생도 돈 많은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연인이 생기면 언제라도 진행할 수 있는 데이트 코스가 바로 그렇다.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나도 그랬다. 좋아하는 친구와 두 장의 똑같은 티켓을 들고 영화관에 가는 것은 식상하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설렘 가득한 데이트 필수코스이기 때문이다. 이번 달엔 어떤 영화가 개봉되는지 누가 출연하는지 대략의 줄거리는 어떠한지를 찾아보는 과정은 짝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적 일상이기도 했다.
그런데 내겐 그 사전 조사의 과정이 조금 다른 의미로 거쳐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자막을 볼 수 없고 영어도 잘하지 못하기에 한국 영화라는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결정을 해야 했다. 빠른 액션이 있거나 대사가 별로 없는 작품은 화면이해 능력의 부족으로 또 제외해야 했다. 고르고 고르다 보면 일 년의 상영작 중 몇 편도 남지 않는 빈곤한 상태가 되고는 하는데 그나마도 보기 위해서는 나의 취향은 물론이고 함께 봐야 하는 친구의 호불호는 가볍게 무시되는 경우도 있다. 최선을 다해 고른 영화라 하더라도 눈으로 볼 수 있는 친구의 귓속말 설명이 없다면 줄거리를 놓치기가 십상이다. 하지만 그런 나를 돕는 친구는 몰입 등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만 했다.

언젠가 한 번은 전개가 빠르지 않은 잔잔한 스토리의 한국 영화를 골랐지만 대사의 대부분은 외국어라 결국 이해를 포기한 적도 있었다. 더빙이나 화면해설이 첨부된 해외 극들을 처음 마주했을 때다. 그 때 놀람을 넘어 흥분을 경험했던 것은 영화관과 관련한 웃픈 기억들과 오버랩 돼서였을 것이다.

다행히 몇 년 전 부터는 대한민국 영화관에서도 화면해설 콘텐츠를 상영하고 있어서 이젠 다른 나라 이야기를 하며 마냥 부러워하는 신세는 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화면해설 상영이라는 것이 한 달에 두세 번 그것도 서울지역에 고작 한두 군데이다. 그럴 때마다 영화를 보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밖에 볼 수 없어서 내 스케줄을 영화에 맞춰야 하는 주객이 전도된 상황을 마주할 때가 많다.

해설을 입히는 작업도 개봉된 이후 시점에 추가로 진행되는지 최신 개봉작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보고 난 후에 한 달 정도 지난 것들을 보게 된다. 친구와 같이라도 가려면 왜 꼭 그 시간에 그 멀리 그 영화를 봐야 하는지 설득과 타협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마저도 그 전에 비한다면 너무도 감사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배리어프리로 설계된 작품 한 번 감상한 이후에 오는 다른 영화 볼 때의 헛헛함이란 그전의 갈증에 비할 것 못 되게 더욱 타는 목마름이다. 풀만 먹고 살던 어느 집 밥상에 고기 한 점 올려주고 다시 몇 날 며칠 풀만 주는 상황과 비슷할지 모르겠다. 난 원치 않게 편식을 해야 하는 문화적 비건으로 살았는데 내가 태생적 채식주의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후에도 또다시 먹을 고기가 없어서 비건으로 사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며칠 전 넷플릭스에서 ‘승리호’라는 영화를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라 내가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친구들이 함께 보자기에 할 수 없이 한 자리를 채웠다. 그런데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오늘 개봉한 따끈따끈한 영화에 화면해설 옵션이 있었다. 장면을 설명하고 배우들의 동작을 말해주는 친절한 설명이 방금 공개된 영화에도 있을 수 있었다. 내용이 어떤지 어떤 배우가 나오는지는 그때부터 내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전에 없던 일이 내게 벌어졌고 난 다른 이와 동시간에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이 되고 있었다.

‘영화 보고 식사하고 차 마시고…’ 이제 내게도 그런 평범한 일들이 남들과 다르지 않게 허락되는 순간이었다. 한 편의 온전한 영화감상을 마치고 넷플릭스의 다른 콘텐츠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아직 모든 영상이 화면해설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꽤 많은 제목 옆에 화면해설 옵션이 달려 있었다.

난 오늘 희망을 보았다. 하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단지 시도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OTT(Over The Top,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는 TV 서비스)에서 가능하다면 다른 제작사들이나 영화관에서 못 할 이유는 없다. 난 이것은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시작의 신호라고 믿는다. 그러길 바라고 그래야만 한다. 소수가 누리지 못하는 일상의 익숙함을 승리호의 출발과 함께 모두가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불편하다고 느껴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은 가능하지만 아직 이뤄지지 않는 것들이다.

[더인디고 THE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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