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그녀에게도 ‘닥터페퍼’를 마실 권리가 있다

1
134
▲겨울 한강 철새 ⓒ더인디고
▲겨울 한강 철새들이 얼음위에서 먹이를 찾고 있다 ⓒ더인디고

[더인디고= 안승준 집필위원] 요즘 나에게 한 명의 친구가 생겼다. 그녀는 누구보다 특별한 삶을 살고 있지만 특별한 친구라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은 그녀가 지나온 어떤 길이나 조건도 또한 현재의 상태도 내가 그녀와 친구가 되는 데에 있어 아무런 특별한 다름을 가지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40개 나라에서 민간외교관의 역할을 수행하던 꿈 많은 친구는 런던 정경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세계에서 도시보건학의 최고로 꼽히는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의 오퍼까지 받았다. 하지만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던 그녀가 받아든 것은 시한부 말기 암 판정. 그녀는 ‘살고 싶은 시간 새벽 4시’라는 책을 발표했다.

우연한 기회로 그녀를 알게 되었고 밝은 내공이 깊숙하게 느껴지는 그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무엇보다 싸구려 동정이나 문득 떠오른 희망적 단어 따위를 내뱉는 사람들 속에서 그냥 아무렇지 않은 듯 시시껄렁한 농담을 할 수 있는 조금 다른 친구처럼 말이다.

소화 기능의 저하로 채소나 과일만 먹는 비자발적 비건이 된 그녀에게 맛난 스시집에 가보자거나 온종일을 짐작할 수 없는 통증과 함께하는 그녀에게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잔소리하는 나를 다행히 웃음으로 받아주었다. 말을 잇지 못할 만큼 꺽꺽대는 숨넘어갈 듯한 그녀의 웃음이 좋았고 그래서 더 선을 넘나드는 대화를 이어갔다. 물론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보이지 않는 눈에 대해 역시나 아무렇지 않게 느껴주는 건강한 그녀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난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면서 경험한 그녀의 스토리에 감탄했지만, 그것 때문에 친구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현재 상태에 충분히 공감하고 응원해서도 아니다. 난 때때로 그녀가 다녀온 나라들이나 그녀가 가진 아픔들에 대해 궁금해하기는 하지만 매번 그녀의 활동에 대한 강의를 들을 필요도 없고, 또 얼마나 아픈지와 적당한 치료 방법이 있는지에 대사해서도 논의할 필요도 없다. 그녀 역시 궁금할 때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항상 나의 시력 상태에 대해 어떤 불편함이 있는지 굳이 질문하거나 알아내려 하지 않는다. 그냥 오늘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정도의 이야기가 우리의 짧지 않은 대화들을 채워간다. 그것만으로도 난 그녀가 내게 있어 좋은 친구라는 것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살고 싶은 시간 새벽 4시/사진=yes24 화면 캡처
살고 싶은 시간 새벽 4시/사진=yes24 화면 캡처

그녀의 책 속에 등장하는 의사는 그녀가 세상에 남아있을 시간을 3개월 정도로 한정하고 신변의 정리를 제안한다. 의사의 판정이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그녀가 운이 좋은지는 모르겠다. 그녀는 그것보다 몇 배나 많은 시간을 살고 있지만, 만약 의사의 말이 정확히 맞았다 하더라도 난 신변의 정리라는 것이 필요한 것일까에 대해 동의하지 못한다.

우리는 다음날도 오늘처럼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에 그녀보다 조금 더 높은 확률을 점치지만 그렇다고 내일도 살아있을 수 있다고 확신하지는 못한다. 만약 100살쯤 살 수 있다고 확신하더라도 우리 대부분은 마지막을 준비하는 어떤 시간도 가지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냥 하루하루를 즐기거나 스스로 하고 싶은 일들로 채워갈 뿐이다. 무엇보다 어떤 깔끔한 정리들도 내가 없어진 이후의 세상에서 정리되지 못했을 때와 비교해 그다지 유의미한 긍정적 다름을 생각하기 어렵다.

만약 의사의 판단이 완벽히 틀려서 그녀가 우리보다도 더 건강하게 오래 산다면 신변정리라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행동들은 정말 무의미했던 시간이 되어버릴 것이다. 난 그래서 그녀가 그냥 하고 싶은 일이나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그렇게 지냈으면 좋겠다. 먹는 음식도 삶의 방식도 난 여전히 그녀가 원하는 대로 감당할 만큼의 시도를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술을 마시는 것이 자신의 건강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고 다음 날의 숙취도 예상은 하지만 오늘의 즐거운 시간을 위해 음주의 시간도 갖는다.

그녀에게도 먹고 싶은 것들은 존재하고 난 때때로 그녀도 그것들이 그녀의 몸에 미칠 부정적 영향과는 관련 없이 그녀도 그것들을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스시도 고기도 그것보다 더한 것도 그녀 스스로 다음날의 불편함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다면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죽을 정도로 술을 마시지 않는 것처럼 그녀에게도 다 생각이 있다. 조금 더 건강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몸에 약간의 해를 끼칠 권리가 있고 아픈 사람들에겐 철저히 몸에 좋은 행동만을 해야 한다는 의무 같은 건 없다. 그것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부여된 오롯이 스스로만 판단할 수 있는 행복추구권이다.

다른 이를 걱정하고 염려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최대한의 소극적 범위를 지키지 않으면 간섭이고 폭력이 된다. 어젯밤엔 그녀가 한 달 반이나 참아왔던 욕구를 실행으로 옮겼다. 콜라보다 몇 배는 강력한 카페인이 포함된 ‘닥터페퍼’를 꿀꺽꿀꺽 넘기는 목 넘김의 소리가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어쩌면 오늘 그녀는 매우 아팠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많이 아픈 그녀에게도 조금 더 아플 권리가 있다. 사람들이 가진 많은 가치 중 언제나 건강이 최우선이 아닌 것처럼 때로는 그녀도 닥터페퍼를 마실 권리가 있다.

난 기적을 바라고 기적을 믿는다. 그녀가 누구보다 건강해졌으면 좋겠고 오래오래 웃으면서 통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그녀가 나보다 조금 일찍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그녀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즐거웠으면 좋겠다. 우리는 조금 다르지만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자 친구이고, 그래서 우리는 특별하지 않게 그냥 평범하게 매일매일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난 그냥 민경이가 내 친구여서 좋다.

[더인디고 THE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승인
알림
662db2dd9c586@example.com'

1 Comment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
kommy9@nate.com'
코미나인
3 years ago

닥터페퍼를 한때 유독 좋아했는데 콜라보다 몇배 더 강력한 카페인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저도 닥터페퍼 특유의 향과 톡쏘는 목넘김이 좋아서 한동안 즐겨먹었습니다.
비록 몸이 많이 아프지만 먹고나서 많이 아플지 모르지만 그 순간 행복하다면 누구도 막지 못하겠지요. 제목에 이끌려 클릭했는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