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혼걷이굿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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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숲 앞에 돌이 쌓여 있다./사진=픽사베이
대나무 숲 앞에 돌이 쌓여 있다./사진=픽사베이

언니야, 춥운데…. 양손을 겨드랑이에 끼고 앉아 계집아이가 공중으로 붕붕 올리는 공깃돌을 힐끗대던 희석이 물코를 훌쩍 들이마신다. 똑같이 열 살인데 종석의 키는 계집아이의 턱을 넘지 못했다. 고갱이처럼 마른 얼굴에 햇살이 들비추자 눈 밑에 그림자가 생겼다. 이젠 너 할 차례야. 계집아이가 쥐여주는 공깃돌을 받아든 종석은 눈부신 듯 한쪽 눈을 찡그리며 계집아이를 쳐다본다. 난, 언니가 좋아. 이담에 크면 언니랑 신랑 각시 할꺼다. 종석이 부끄러운 듯 양 볼을 발그레 붉히며 겨드랑이에 숨겼던 손을 쑥 내밀었다. 이거 먹어. 작은 손바닥에 물크러진 곶감이 놓여 있었다. 계집아이는 냉큼 곶감을 집어 입에 넣었다. 곶감은 짠맛이 났다. 그래 네 각시 할 테니까, 얼렁 공깃돌이나 던져. 볼이 미어져라 곶감을 입에 문 계집아이는 아무렇게나 대답해버렸다.

입을 우물거리는 계집아이를 보고 배시시 웃던 종석이 공깃돌을 훌쩍 던져 올렸다. 도토리만한 공깃돌은 허공을 맴돌다 종석의 머리에 곧게 떨어졌다. 어느새 새파랗게 상기된 종석의 곱돌 같은 이마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워메, 저걸 우짜꼬!

여자의 비명이 여자의 귀청을 찢었다. 달려들어 답싹 종석을 안아드는 여자의 두 눈이 겁에 질려 있는 계집아이를 무섭게 쏘아봤다. 지 동생 잡아묵을 아귀 같은 년!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욕지거리와 함께 여자의 손바닥이 계집아이의 등을 몰강스럽게 내려쳤다. 계집아이는 아픔을 참느라 고개를 무릎 밑으로 깊게 처박았다. 등허리의 통증보다 괜한 억울함 때문에 코끝이 맵싸해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사래가 들었는지 기침이 쏟아졌다. 그 바람에 흙바닥에 뱉어진 곶감 덩어리가 뿌옇게 일그러져 보였다. 계집아이는 발딱 일어나 곶감을 발로 사납게 짓이겨버렸다.

– 쌍놈의 곶감!

안방 툇마루 위에 고무신 한 켤래가 가지런히 벽에 기대져 있고, 문 앞에는 가늘게 썬 대오리로 엮은 발이 드리워져 있었다.

“뉘시우?”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니 등이 꾸부정한 웬 노인이 백태가 낀 멀건 눈으로 수상쩍은 듯 여자를 훑어보고 있었다. 손에 들린 우족(牛足)인 듯한 고깃덩어리에서는 검붉은 선지피가 뚝뚝 떨어져 흙마당을 적셨다. 노인의 입에서 옅은 피비린내가 풍겨왔다. 여자는 울컥 비위가 상한다.

“점을 보고 싶거들랑 며칠 후에 다시 와야 할꺼요. 낼 밤부텀 혼걷이굿이 있으니께.”

노인은 고깃덩어리를 펌프 가에 놓인 고무대야에 털벅 던져 넣고는 물을 들이부으며 혼잣말처럼 우물거렸다. 고무대야의 물이 금새 붉게 물들었다. 그때, 발이 쳐진 방문이 한 뼘쯤 열리더니 어린아이의 높고 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놈아, 먼데서 오신 손을 자발읎이 맞아야 쓰겄냐?”

그러자 노인은 사색이 되어 발딱 일어나 발 앞에 고개를 조아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발 뒤의 어린 음성이 다시 푼푼하게 여자에게 말을 걸어왔다.

“낼부텀 상사(相思)로 깊은 물에 제 목숨 던진 초망자(招亡者) 혼걷이허는 큰 굿판이 있어 손수 당(堂)안으로 모시지 못하는 것을 너그럽게 이해하시고 마루에서라도 잠시 다리쉼이나 하소.”

여자는 문득 목소리가 귀에 익다고 느껴졌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대부분 가늘고 높은 편이다. 그렇지만 똑같은 미성(未聲)들에도 나름대로 특징이 있는 법이다. 신경을 건드릴 만큼 고음의 목소리는 흔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그 목소리를 끝내 기억해내지 못했다. 목소리 주인의 얼굴이라도 봤으면 싶어 고개를 기웃거렸으나 완강하게 쳐진 발 뒤의 어둔 방은 환한 곳에 서 있는 그녀에게 보일 리 만무했다. 방문께를 힐끗거리며 여자가 툇마루 끝에 주춤 엉덩이를 걸치고 앉자 다시 어린 음성이 노인을 다그쳤다.

“너, 얼른 정지간에 삭혀둔 대추차 한 잔 따끈하게 뎁혀 내오도록 혀라.”

노인이 겁질린 얼굴로 부엌 쪽으로 뒤뚝이며 달려갔다.

[더인디고 THE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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