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낮은 시선으로부터] 그가 살았던 그때에도 있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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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초상 /사진=픽사베이
▲청년의 초상 /사진=픽사베이

[더인디고=이용석 편집장]

이용석 편집위원
더인디고 편집장

아주 오래된 기억 갈피짬에 제법 단단한 옹이처럼 박힌 한 사람이 있다. 10여 년 전인가, 참 고적하고 쓸쓸하기만 했던 그의 장례식장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마치 풍문처럼 친구들에게 전해졌던 그의 죽음은 너무 일렀기에 황망했지만, 드문드문 전해졌던 그의 고단한 살이를 생각하면 어쩌면 올 것 왔다는 묘한 안도감이 오히려 더 컸던 죽음이었다.

연고 없는 죽음.

재활원에서 함께 생활했던 몇몇 지인들만이 옹기종기 모여 한 줌의 재가 된 그를 소지(燒紙)처럼 바람에 날렸다. 바람결을 타고 흩어지는 그를 위해 나는 평소 그가 즐기던 담배 한 대 불붙여 향처럼 피웠다. 하얗게 쏟아지는 햇살 아래 아지랑이처럼 타오르던 담배 연기는 한숨처럼 그와 섞여 우리를 휘돌다 휘돌다 화장장을 에워싼 산 들머리 너머로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그는 고단하기만 했을 짧은 살이를 기어이 마감했고, 우리는 어린 시절 함께 했던 한 사람을 또 보냈다.

80년대 초반 고아였던 그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재활원을 쫓기듯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만 18세를 넘긴 그를 시설은 더 이상 보호할 의무도 이유도 없었던 셈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중증의 장애를 가진 고아 청년이 시설에서 나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숙식이 제공되는 월급 10만 원짜리 싸구려 일자리를 찾아 헤매거나, 기술을 배우기 위해 1년 더 시설생활을 하는 거였다. 물론 사고무친인 그만이 겪는 상황은 아니었다. 당시 시설을 나온 가난하기만 했던 모두의 암담하지만 감당해야 했던 현실이었기에 우리는 쉽게 체념했고, 빠르게 적응했다.

상도동의 비탈진 둔덕 끝에 있던 한 허름한 연립주택 반지하 방에 나, 그리고 친구 서넛이 어울려 살았던 적이 있었다. 한낮에도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반지하 단칸방에는 부엌도 화장실도 없었다. 두 평 남짓한 방은 비좁고 어두웠으며 축축했다. 일 년 내내 습기로 눅눅한 방바닥에 깔린 노란 비닐장판은 비만 오면 습기에 젖어 들떴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진동했다. 게다가 밥 한 끼라도 해 먹으려 해도 시커먼 매연이 피워 오르는 곤로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참 지지리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때 그도 함께 했다. 그림을 제법 잘 그렸던 그는 이태원의 한 모사 그림 가게(명작을 베껴 미군들에게 기념품으로 팔던 화방)에 취직해 다녔다. 어쩌면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이태원 화방 구석진 모퉁이에서 종일 그림을 그렸던 그는 매일 모네였다가 피카소였으며, 이중섭이었고 박수근이기도 했다.

퇴근길에 들러 골목 어귀 구멍가게에 들러 소주 한 병을 귤 하나 안주 삼아 마시곤 불콰해진 낯빛으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 그는 이제 없다. 그림뿐만 아니라 현란한 핑거 주법으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도 참 감미롭게 불렀던 그는 재주가 많은 만큼 꿈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도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듯하다. 한 1년 남짓 반지하 방 생활을 했던 우리는 이후 뿔뿔이 흩어졌고, 그나마 비빌 언덕이라도 있던 나는 나대로 먹고 살기 위해 버둥대느라 그의 소식을 그저 스치듯 풍문으로나 전해 들었을 뿐이다.

고아였고 중증의 장애인이었으나 재주 많았던 한 청년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을 의탁할 곳을 찾았을 때야 비로소 세상은 자립주택 한 자리와 수의값도 모자랐던 장례비용만을 지원하였다. 누구의 도움도, 그렇다고 변변한 준비도 못하고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재활원을 나온 이후 단 하루도 맘 편히 살 수 없었을 그의 고역스런 살이를 미처 가늠해 보지 못했다. 나 역시 이런저런 일자리를 전전하며 생계를 꾸리느라 다급했으니 오죽했을까. 한참 후에 내가 본 것은 뻣뻣한 질감의 싸구려 수의를 걸친 채 추레한 몰골로 화장장 대기실에 누워 있는 그였다.

지난 7월 13일 국가는 보호종료아동의 자립지원을 위해 현행 만 18세에서 만 24세까지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보호종료아동 지원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보호아동이었던 그가 아무런 준비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지 무려 30여 년만의 일이다. 만약에, 그때에도 자립할 수 있는 준비 시간이 주어졌다면 그는 이중섭이나 박수근의 그림을 모사하는 그림쟁이가 아니라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어엿한 화가가 되었을 것이다. 아니다 어쩌면 그는 세상 모든 연인들의 마음을 노래하는 가수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매해 약 2,500여 명의 보호종료아동들이 아무런 자립준비도 없이 만 18세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단돈 500만 원을 들고 세상에 내몰렸다. 2016년 보건복지부 자료를 보면, 보호종료아동의 기초생활수급 경험이 40%에 이르고 평균 대학 진학률은 52%, 월평균 수입은 123만원에 불과하다는 조사 결과는 당연하다.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시작이 미약했으나 그 끝이 창대할 것이라는 거짓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

‘공정’을 ‘능력주의’로 포장한 자들이 이미 저만치 앞서 있는 인생의 출발점 앞에서 매년 2,500여 명의 ‘그들’이 걸음을 멈추고 망연히 서 있다. 이제야 세상은 그들에게 미흡하나마 기대어 걸음을 뗄 수 있는 손을 내민다. 다행이다. 그렇게라도 국가에서 내민 손을 잡고 첫걸음이나마 뗄 수 있는 ‘그들’이기를…

[더인디고 THE 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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