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다음 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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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4호선 창동역. ⓒLERK. 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Alike 4.0/위키미디어
▲지하철 4호선 창동역. ⓒLERK. 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Alike 4.0/위키미디어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내방송이 나오지 않는다. 이어폰 소리 때문에 소리를 놓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다음 역으로 가는 열차의 스피커에 온 신경을 집중해 보지만,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시계를 보면 목적지에 도착할 때가 거의 다 되었는데 특별한 단서는 보이지 않고 결국 주변의 도움을 받는 쪽을 택한다.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다행히 친절한 목소리의 아주머니가 방금 도착한 역이 ‘쌍문’ 임을 알려주신다.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드리니 목적지가 어디냐고 다시 물어오신다. 노원까지 간다는 말에 반가운 기색을 보이시며 같이 내리면 되겠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이제 곧 내려야 하니 준비하라는 말을 덧붙이신다.

“다음 역은 창동이고 한 정거장 더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라는 나의 물음엔 확신 가득한 목소리로 “창동 다음이 쌍문이고 그다음인 이번 역은 노원이예요.”라고 웃으면서 재차 알려주신다.

방송이 나오지를 않아서 당황한 내가 착각을 했나 하는 생각으로 다시 머리를 굴려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역은 창동이다. 오늘 오전에도 그랬고 어제 출퇴근길에도 그랬는데 갑자기 그 순서가 변할 리가 없다. 조심스럽게 “이번 역은 창동인 것 같은데요.”라고 말씀드려보지만, 아주머니의 웃음소리는 더 커지고 재차 노원이라는 설명을 덧붙이신다.

한 번 더 슬쩍 “창동 아닌가?” 하는 혼잣말 냈을 때는 그분의 기분이 조금 안 좋아지신 듯해 더 말을 잇지는 못했다. 열차의 문이 열리고 얼른 따라오라며 내 팔을 잡아끄는 요청을 사양하는 나에게 아주머니는 “내가 똑똑이 보고 내리라는데 왜 내 말을 못 믿어요?”라며 닫히려는 문으로 급히 뛰어내리셨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노선이라 다음 역이 우리 집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너무나도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아주머니 덕분에 난 노원역에 도착하고 개찰구를 나가는 순간까지도 내 발걸음과 기억을 의심해야 했다. 다행히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아서 특별한 고생 없이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분은 지하철 노선에 대해 잘 모르는 분이셨을 가능성이 높다. 노선도를 보면서도 내릴 역을 착각하셨다는 것은 관련한 경험이 매우 적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지팡이 들고 다니는 나보다는 적어도 본인이 잘 알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제일 위험하다는 말이 있다. 한 가지 지식만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사실이 틀릴 수 있다는 의심을 하지 못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책 속에 여러 다른 생각들이 존재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한 권의 책만이 진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책 한 권도 읽지 않았을 것이라 판단되는 사회적 약자들 앞에서 그 확신은 자신감의 크기를 더욱 크게 가진다.

내릴 역을 알려주시던 아주머니도 그랬지만 휴대전화 대리점의 아저씨도 그랬고 보험상품을 판매하던 청년도 그랬다. 난 IT 전문가는 아니지만 내가 살 휴대전화와 가입할 요금제에 대해서는 꽤 많은 정보를 찾아보고 정리해서 판매점에 간다. 최근에 새롭게 출시된 요금제와 기기의 기능에 관해 묻는 내게 점원은 그런 것은 아직 없다며 본인이 알고 있는 것만이 최고의 정보라는 듯 나를 설득한다. 은퇴 후에 부자가 되게 해 준다며 연금보험을 설명하던 아저씨도 시각장애인인 내가 복리나 원리합계쯤은 어렵지 않게 계산하는 수학 교사인 것은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본인이 들고 있는 광고지 속의 복리계산이 어떤 속임수를 가졌는지 모르시던 보험 판매원 아저씨도 신제품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휴대전화 대리점의 청년도 스스로 가진 지식에 대한 믿음만은 확고했다. 나이가 들고 읽은 책의 권수가 늘어가면서 경험한 것도 아는 것도 점점 늘어난다. 어떤 면에서는 전문가라 불리기도 하고 어떤 것은 직업으로 가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어떤 것도 내 의견이나 지식이 100% 옳을 수는 없다.

난 수학 교사이지만 학생들 앞에서 쉬운 계산을 틀릴 수도 있고 30여 년 동안 시각장애인으로 살았지만, 시각장애가 없는 이들보다 모르는 시각장애 특성도 있을 수 있다. 마흔을 넘은 성인이지만 5살 꼬마보다 모르는 것이 있을 수도 있고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초등학생 문제를 풀지 못할 수도 있다. 많은 책을 읽었지만 읽지 못한 책들이 더 많고 다양한 경험을 했지만 못해 본 것이 더 많다.

배울수록 알아갈수록 겸손하게 다시 생각해야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책 한 권만 읽은 고집쟁이가 될 수 있다. 다음 역이 어디인지 누군가 물어온다면 꼼꼼하게 살펴본 후에 알려주도록 하자. 그 상대가 어려 보이거나 약해 보이거나 어리숙해 보이거나 하는 것이 당신의 무지함에 자신감을 더하는 근거가 되지 않도록 조금만 더 겸손하자.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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