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의 낮은 시선으로부터]전지적 장애시점 – 추석, 삶을 리셋했던 그들만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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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명절 보름달
추석명절 보름달

[더인디고=이용석편집장]

이용석 편집장
더인디고 편집장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그치더니 이내 햇살이 안개처럼 하얗게 피어오르는 추석날 이른 오후다. 주말 휴일 포함해 5일이나 되는 연휴가 시작되고 나서도 미뤄둔 일거리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렇다고 해서 모처럼 얻은 황금 같은 휴일은 알토란 같이 살뜰히 쓰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마땅한 계획은 없다. 코로나19 창궐 이후로는 명절 무렵 약속 없이도 무시로 만나던 오랜 친구들과의 모임도 시나브로 미뤄졌고 먼 길 떠나야 하는 친지 방문도 자제하는 중이라 그저 집안을 맴돌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아쉬운 마음도 딱히 없다.

어릴 때부터 명절마다 차례상을 차리느라 부산해지는 집안 분위기나 가깝고 먼 친척 어른들의 방문과 길어지는 술추렴, 그리고 본 적조차 없는 선대의 묘지를 방문 – 산길을 오르지 못하는 나는 당연한 듯 집에 남았지만 – 해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가 오히려 귀찮고 부담스러워했던 터라 명절에 집에만 머무는 게 익숙하기도 했다.

되짚어보면 우리 집안은 그다지 호들갑스럽게 명절의 절차를 세세하게 지키는 축에 속하지도 않았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영남 어디쯤이 고향이지만 일찌감치 탈향해 분주히 오가는 일가친척도 단촐해 명절마다 찾아오는 이들 또한 몇 되지 않았다. 명절 차례야 꼬박꼬박 지냈지만 홍동백서니 어동육서 따위를 따질 만큼 대단한 반가(班家)의 후대도 아니어서 절차 대신에 그저 떡과 전, 과일 따위를 푸짐하게 올리고 향이나 피우면 그만이었다. 어릴 때 나는 좀체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있었는데 상에 올린 음식들에게 절을 하는 풍경이었다.

절이라는 절차, 그러니까 온 식구가 일렬로 서서 경건한 표정으로 두 손을 이마에 올려붙이고 허리와 무릎을 꺾어 상머리를 향해 정수리가 훤히 보이도록 깊게 고개를 조아리는 절을 연거푸 하는 걸 보면서 우습기까지 했는데, 다행인지 나는 그 행위에서 용케 열외였다. 시설에 입소하기 전까지는 그저 앉은뱅이 – 내 어릴 적 장애 상태를 직관적으로 표현한 것이니 부디 장애비하라고 불쾌해하지 마시길 – 어린아이였던 나는 온 식구가 참여했던 행위인 절을 할 수가 없었다. 직립상태에서 시작해야 하는 절은 직립상태에서 온몸을 정해진 차례대로 구부리고 꺾고 내리고 올리는 신체적 운동행위다. 당연히 나는 제외될 수밖에 없었고, 차례를 지내는 동안 방 한구석에 오도키니 앉아 구경꾼 노릇만 했다. 차례상 위에 올려진 음식들 냄새와 향이 피워낸 연기로 뿌옇게 흐려진 그 귀기(鬼氣)스럽기까지 했던 명절 아침의 집안 풍경은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 떠름한 기억으로 떠오르곤 한다. 그다지 진보적이거나 평등주의자이기는커녕 강짜 보수였던 아버지는 명절 차례에는 여자형제들까지 참여시키곤 했는데 그래서 차례에 빠진 식구는 부엌에서 음식 수발해야 했던 어머니와 장애를 가진 나 두 사람이었다. 차례를 마치고 나면 나는 그야말로 곤혹스러운 처지가 되곤 하는데, 동네 어른들과 일가친척의 방문과 술추렴 중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나에 대한 평가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내가 가진 장애로 인해 고통스러울 부모에 대한 동정과 안쓰러움 그리고 미래를 걱정하는 하소연이 내내 이어지고 급기야 부모의 신세 한탄과 서로들 부둥켜 안고 대성통곡을 하고나면 끝이 나기 마련이다. 사지 멀쩡한 형제들이야 진작에 집을 빠져나갔고 그 지청구를 내내 오롯하게 혼자만 들어야 하는 사람은 언제나 나 혼자였다.

혹독했고, 잔인했다. 무차별적이었고 집요했으며 무례했다. 그러고 나면 어른들은 말끔한 표정으로 언제나 내 손에 천원 짜리 지폐 몇 장을 쥐어주곤 했는데, 얼떨떨한 심정으로 그 황당한 푸닥거리를 겪은 나는 치도곤을 당한 듯 며칠을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집안 살림을 거덜 낸 아이이거나 미래 없이 부모형제의 짐이 되어 기생할 아이였던 장애를 가진 나는 탈가족을 하기까지 어린 시절 내내 명절마다 집안의 천덕꾸러기라는 낙인을 새삼 확인하며 보냈다. 제법 머리가 굵어지고 난 이후에는 나 역시 차례를 마치면 부리나케 집을 나섰다. 일찌감치 시설에서 생활해서 어린 시절 어울렸던 친구들조차 데면데면한 사이여서 갈 곳조차 변변히 없어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재활원 친구들과 어울리며 며칠을 보내고 나면 명절은 훌쩍 지나 다시 평화로운(?) 세상이 찾아오곤 했다.

어른이 되고 나서 새삼 깨달은 것이지만, 절은 명절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준비한 진상물을 차려놓고 조상에게 올리는 첫인사, 즉 리셋하는 행위이다. 어릴 적 명절마다 모여 내 장애를 걱정했던 어른들은 정작 나를 걱정했던 것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것, 친척집 한 아이의 장애에 대한 걱정은 자신들이 짊어지고 있을 버거운 삶을 위로하는 방식이며 해를 새롭게 시작하는 절과 같은 절차였던 것이다. 그들에게 내 장애는 더 큰 불행이어야 하고 아이의 불행은 서로가 짊어진 각자의 불행을 희석시키고 명절 때나마 서로의 불행을 확인하고 하소연하며 술주정을 핑계로 신세를 한탄하면서 잠시 잊을 수 있는 쉴 짬의 적절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불행과, 내 장애를 떠안고 살게 될 것이 자명한 우리 식구들의 불행의 무게를 견주어 보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며 한 해의 삶을 리셋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렇게 여기면서 나는 대단찮은 휴일인 추석을 산다.

[더인디고 THEINDIGO]

오래 전에 소설을 썼습니다. 이제 소설 대신 세상 풍경을 글로 그릴 작정입니다. 사람과 일, 이 연관성 없는 관계를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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