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상처받은 복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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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위에 떠 오른 보름달 ⓒ픽사베이
▲물가 위에 떠 오른 보름달 ⓒ픽사베이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가족들 모이는 명절엔 과일이며 전이며 고기 같은 음식들이 풍성하다. 오래전 언젠가처럼 평소에 먹을 수 없는 특별한 음식 먹는 것도 아니고 내 어릴 적처럼 산더미만큼 전 부치고 나누는 것은 아니지만 추석이나 설음식 먹을 때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풍족해진다.

쌀밥에 고깃국, 각색 나물과 상큼한 과일 먹는 것이 특별한 게 없는 것이 분명하지만 명절에만 느낄 수 있는 여유로운 느낌은 다른 이들도 나와 별다르지 않은 듯 나누는 선물은 예전이나 요즘이나 과일 상자와 고깃덩어리이다.

우리 집에도 어머니 댁에도 이런저런 택배 박스들이 하나둘 따뜻한 마음 담고 찾아왔다. 감사한 마음 한가득 담아 하나하나 뜯어 보고 정리할 때면 과자 선물 세트 받던 어린아이처럼 한껏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런데 이럴 때마다 느끼는 아쉬움 하나가 있다면 고르지 못한 내용물의 상태이다. 애초에 넣을 때부터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옮겨지고 쌓이고 시간이 지나다 보니 과일은 한쪽 귀퉁이가 물러져 있고 고기는 꾹 눌러져 멍이 들어 있기도 하다. 찌그러진 케이크도 녹아버린 초콜릿도 원래의 예쁜 모양이 온전히 간직되어 있지 않다. 특별한 사고 없이 무사히 우리 집까지 도착한 녀석들을 꺼내고 상처 입은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문득 나의 인간관계가 떠올랐다.

하루하루 지내다 보면 적지 않은 선물 같은 인연들이 찾아온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때로는 길을 가다가 맺어진 인연들도 내겐 소중한 사람이 되어 관계를 이뤄간다. 한 개씩 개별 포장된 복숭아처럼 향긋한 내음이 되어주는 사람도 있고 단단히 진공 포장된 고기처럼 든든한 인연도 있다. 이따금 파티처럼 만나게 되는 케이크 같은 동료들도 약방에 감초처럼 달콤한 향내 나누는 친구들도 있지만 살다 보니 그 어떤 누구와도 다툼없이 오해 없이 살 수는 없다. 완전하고 영원할 것 같은 인연과도 미움이 생기고 깨어지고 갈라지기도 한다. 사귐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때때로 밉지 않았던 이가 없다.

벌레 먹은 듯 부딪힌 듯 한쪽이 물러버린 복숭아를 정리하면서 상처받은 나의 인연들을 떠올렸다. 예쁘고 싱싱함 그대로 간직한 다른 복숭아들 틈에서 다쳐버린 그 녀석이 더 좋아 보일 리는 없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조금 상한 것들을 모두 버리다 보면 내가 마음 옮길 싱싱한 새로움은 그리 많이 남지 않는다. 세상에 나와 마음 나눌 또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지 알 수는 없지만 잠시 다친 마음으로 그간의 인연을 통째로 버릴 수는 없다.

할머니는 생전에 벌레 먹은 과일이 훨씬 더 맛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생각해 보면 나를 둘러싼 인연들도 그렇다. 가까이 지내다 보니 오래 함께하다 보니 부딪히기도 하고 다치기도 했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 없기에 이기적일 때도 있었겠고 비겁할 때도 있었겠지만 그건 나도 그랬다.

전부 썩어 버린 게 아니라면 조금만 도려내어야 할머니 말씀하시던 진짜 맛있는 복숭아를 먹을 수 있다. 작은 미움을 참아내야 단단하게 다져지던 인연을 지킬 수 있다. 며칠의 연휴 동안 옮겨진 선물상자 속 음식들은 하나같이 원래의 모양을 지켜내지 못했지만, 그것들이 모여 이번에도 나의 풍성한 한가위를 만들어 주었다.

솔직하게 말하건대 올 한 해를 살아낸 나의 인연들도 내게 미움과 오해와 상처로 삐뚤어지고 멀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 또한 그런 인연들이 여전히 있기에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다친 과일도 상처 난 인연도 조금만 도려내어야 온전한 부분을 지켜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풍족한 추석 상처럼 넉넉하고 아름다운 관계들을 지키며 살아가길 바란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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