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영의 오늘] 바뀌는 명절에 합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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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9일 추석 연휴 첫날 새벽,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본 일출 ⓒ 더인디고
▲지난 9월 9일 추석 연휴 첫날 새벽,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본 일출 ⓒ 더인디고

[더인디고=조미영 집필위원]

조미영 집필위원
조미영 더인디고 집필위원

“우리 이번 추석도 부산 가지 말까?”

“그라까? 나흘동안 우리 식구 오개오개 모여서 편하게 있으까?”

3년째 물러나지 않는 역병으로 움직이기 꺼려지는 것도 있지만 부모님 다 돌아가신 뒤의 고향은 그 의미가 반감되었다. 작은 이유라도 챙겨서 서울 부산 왕래하던 과거는 빛바랜 흑백사진이 되었다.

추석 일주일 전, 갑자기 마음이 변했다.

“그래도 언니들 보고 싶어, 부산 가자!”

남편은 그러자 했고 나는 급하게 숙소를 검색했다. 성인 4인이 친척 집에서 머무는 게 이제는 서로 부담되니 언제부턴가 숙소를 따로 잡았다. 웬만한 펜션은 ‘예약 마감’ 빨간 글자가 깜박거렸다. 큰집과 가까운 곳에 겨우 1박 예약을 마치니 서울 올라오는 길에 문경이나 상주에서 1박 하고 오자는 남편 말에 예약했는데 단양이었다. 머리는 문경인데 손은 단양으로 검색하고 예약 완료한 나를 한 대 치고 싶었다. 그래도 반드시 문경이나 상주여야 되는 건 아녔으니 이번 추석은 서울 부산을 벗어난 곳에서의 하루가 설레었다.

부산의 숙소에 밤 10시가 넘어 도착하고 보니 대략 난감이었다. 예전 친정집을 기억나게 하는 허름한 동네, 낡은 가정집을 개조하여 펜션이란 간판을 달고 있었다. 내부는 깔끔해서 다행이라 안도하면서 예약할 때 2층 침대를 보지 못한 내 눈을 원망했다. 어린 아이 둘을 동반한 4인 가족에게 좋을 숙소였다. 가장 가벼운 딸이 2층으로 올라갔고 더블침대와 1층 침대를 오가며 아들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가족이라도 함께 잔다는 게 자폐인 아들에겐 불편한가 보다. 우리가 없을 때도 혼자만의 공간을 차지하고 살 수 있을까 생각하니 그리 되도록 하겠다는 결심이 섰다.

다음 날 아침, 숙소 옆 용두산공원 산책하면서 전날의 불평이 사라졌다. 한 가지가 좋으면 다른 허물이 묻힌다는 사실에 웃음이 났고 멀리 보이는 바다와 산등성이의 따닥따닥 붙은 집들을 보면서 추억에 젖었다.

예쁘장한 친구가 늦은 밤 택시를 타고 산동네 아래서 내리자 택시 기사가 했다는 말,

“외모는 2층 양옥집에 살 거 같은데 이런 동네에서 사네예.”

예나 지금이나 겉 보고 사람 판단하는 건 변함이 없었나 보다. 사람 무안하게 대놓고 할 말 안 할 말 다 하는 것도 마찬가지. 그 친구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문득 궁금했다.

차례나 기제사 모시는 일이 좋다던 큰형님 나이가 74세다. 몇 년 전부터 음식 장만하는 게 버겁다고 동서들이 각자 과일, 생선, 튀김 등을 나눠서 명절 당일에 가져 오기로 했다. 그래도 탕국과 나물 등 준비하는 게 쉽지 않은 큰형님이 결국 차례를 그만하자고 했다. 추석은 건너뛰고 설날은 지금처럼 하자고 하니 다른 형님들이 그건 아니라고 했다. 제례를 우리가 의논해서 하는 게 아니라 구전으로 내려오는 법도를 따라야 한다며 동서들이 반대했다.

“행님아, 하면 설 추석 다 하고 안 하면 둘 다 안 하는 기라예. 행님이 힘들모 못하는 거 아이겠습니꺼?”

사투리가 유난히 심한 둘째 형님의 말에 셋째와 넷째도 거들었다. 막내며느리인 나는 그저 형님들의 말만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번 다 안 하는 건 서운한데… 그래, 고마 하지 말자.”

큰형님은 아주버님에게 여러 번 말했으나 귓등으로 듣는다며 막내인 남편에게 아주버님을 설득해 달라고 하소연했다. 막내지만 집안 대소사에 잘 나서는 남편이니 남편 말은 들을 것이라고.

조상을 잘 섬겨야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고 벌초며 묘사에 가장 적극적이던 남편이 나는 반대할 줄 알았다. 남편은 알았다고 다음 기제사에 의논해 보자고 했다. 의외의 반응에 정말 안 할 거냐고 물었더니,

“중심되는 큰형수가 저리 말씀하는데 계속하자고 우째 말하노? 그라고 세태가 바뀌는데 우리도 바뀌야지, 명절 전에 다 모여서 묘사 지내고 좋은 식당에서 밥 한 끼 먹고 기회 되면 큰집에서 차 한잔하고 헤어지면 되겠구마. 어무이 아부지 제사도 같이 모시기로 했으니 복잡하지 않을 때 일 년에 세 번 형제들 만나면 되지 않긋나?”

“오올… 우리 아빠 고지식한 줄만 알았는데 화통하시네.”

딸의 ‘엄지척’에 남편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명절 때마다 주차장으로 변하는 경부고속도로에 우리 가족은 빠지지 않고 올라 있었다. 민족의 대이동에 합류하면서 도로 위에서 운전을 교대하며 스무 시간이 넘어도 짜증없이 고향 가는 길을 즐겼다. 휴게소에서 한숨 자기도 하고 귀경길 촬영하는 하늘의 헬리콥터를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기도 했다.

고속도로가 새로 생겨나고 경부선이 아니라도 서울 부산 이동 방법이 많아져 예전의 그 모습은 재현되지 않지만 여전히 평일보다는 지체 정체되는 명절 길이다. 이제 그 모습을 TV 뉴스에서만 보게 될 것 같다. 조금 아쉬운 감이 없지 않지만 마음먹으면 언제든 떠나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우리는 ‘신유목민’이 아닌가 싶다.

[더인디고 THE INDIGO]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 행복을 나누면서 따뜻한 사회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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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영
1 year ago

저희 친정도 일년에 열두번 제사하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모든 차례 제사 다 없어졌어요 맏며느리가 왕이죠 ㅎㅎ
명절을 비롯하여 집안대소사 요양원에 계신 두어머님 뵈러 언제든 주저없이 정체된 길을 나서는 선생님 가족분들 보며 늘 감탄하고 존경했어요
이핑계 저핑계로 가족들과 소원해지는 요즘 끈끈한 가족애 읽히는 귀한 글 따숩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