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실리카겔을 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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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카겔과 비타민 C/사진=안승준
▲실리카겔과 비타민 C/사진=안승준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연말이 되면 한 해 동안의 일들을 되돌아보고 서로를 격려하는 회식들이 이어진다. 학교도 전 교직원 혹은 부서별로 모임을 하는데,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일을 안 한 것도, 격려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부장님이 생각해 낸 아이디어는 비타민 선물이었다. 3000 mm 메가도스 비타민 C! 우리 부서는 이 알약들에 힘내라는 메시지를 담아 나누었다.

피곤한 연말을 지내던 나에게도 비타민은 분명 반가운 선물이었다. 먹기만 하면 곧장 드라마틱한 효과를 내어줄 것 같은 카피 문구와 거대한 용량에 어울리게 알약의 크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약이 정말 크네요. 느낌도 맨질맨질하고…”

신기해하는 부원에게 부장님은 본인도 그렇게 생각한다면서 동의의 표시를 보낸다.

“나도 하나 먹었는데 다른 알약들과는 좀 다르네요.”

다른 것과는 좀 다른 모양과 크기에 ‘껍질을 더 벗겨내야 하나’하는 의심도 잠시 했지만, 본인도 먹었다는 다른 이의 말에 더 이상의 주저 없이 입속으로 약을 삼켰다.

‘꾸우우우울꺼어어억’

웬만한 약은 몇 알이라도 한꺼번에 삼킬 수 있는 나였지만 이건 목 넘김이 꽤 힘들었다. 목구멍을 통과할 때부터 식도로 내려가는 느낌이 뻑뻑하게 전해졌다. ‘나도 이렇게 힘든데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때마다 어떻게 챙겨 먹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한번 다른 이의 경험과 비교를 시도했다.

“알약이 원통형이어서 그런지 목으로 넘기는 게 쉽지 않네요.”

“뭐라고요? 원통형?”

그 답이 끝나기도 전에 덩치 큰 부장님이 내 자리로 후다닥 달려오셨다.

“먹은 약 모양 다시 한번 설명해 보시겠어요?”

기억나는 대로 내 목으로 넘어간 약의 모양을 설명하면서 약통의 다른 알갱이들로 손을 뻗었지만, 그것과 같은 모양의 것은 수십 알 중 하나도 없었다. 깜짝 놀라며 다른 통에서 꺼낸 무언가를 내 손에 쥐여 주시며 혹시 이거냐고 묻는 부장님의 말투는 떨리고 있었다.

“네. 이게 맞아요. 이건 뭐죠?”

안절부절못하고 말씀을 이어가는 부장님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되는 실리카겔이었다. 포장된 김이나 새 가구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습제의 일종인데, 평소에 보던 모양과는 다른 형태여서 그것이라고는 짐작하지도 못했다. 보통의 알약보다는 조금 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도저히 먹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판단하기엔 크기가 알약과 흡사했다. 다른 알약과는 모양도 조금 다르긴 했지만 그렇다고 뭔가 위험한 것이라든가 먹어서는 안 된다든가 하는 감정을 직관적으로 느낄 만큼 특이한 모양도 아니었다.

플라스틱 케이스는 혀에 닿았을 때도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긴 했지만 코팅된 알약 중에 그런 것도 있으리라 착각하기엔 충분했다.

60개의 다른 알갱이들과 비교하면 분명히 뭔가 다른 하나를 골라낼 수도 있었겠지만, 61개의 덩어리 중 첫 번째로 집은 것이 하필이면 실리카겔이고 다른 것과 비교하지 않고 먹을 확률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내 경우였다.

▲먹지 말라는 경고문구가 쓰인 실리카겔/사진=안승준
▲먹지 말라는 경고문구가 쓰인 실리카겔/사진=안승준

“먹지 마세요”라는 친절한 문구가 적혀 있긴 했지만, 나에겐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맨질맨질한 글씨일 뿐이었다.

“병원을 가야 하나? 보건실이라도 가야 하나? 구토라도 해야 하나?”

온갖 걱정을 늘어놓으시는 부장님과 달리 침착하게 인터넷 검색을 해 보던 내 컴퓨터 화면에는 별일 없을 수 있지만, 종종 장폐색으로 사망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의 문서가 펼쳐졌다. 일단 검색된 내용대로 물을 많이 먹고 뱃속의 상태를 유심히 관찰했다. 뱃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기분 탓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밥도 별다른 것 없이 잘 먹고 다음 날엔 화장실을 자주 가긴 했지만 특별한 차이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장님의 걱정은 계속되어서 결국 다음날 퇴근 후 가까운 내과를 방문했다. 앞으로 찍고 뒤로 찍고 누워서 일어나서 엑스레이 촬영을 반복했다. 의사 선생님의 결론은 다행히 큰일 없이 배출된 것 같다는 소견이었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때부터 밀린 식욕이 밀려오고 갑자기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긴장이 풀렸는지 졸음도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병원비까지 대신 계산해 주시는 부장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거푸 드렸다.

천만다행으로 나에겐 나쁜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그 덩어리가 조금 더 독성이 있었거나, 내 내장 기관이 조금 덜 넓었거나 했다면 난 정말 어떤 상태가 되었을지 모른다. 실리카겔에 먹지 말라는 경고문구가 쓰여 있다는 것을 어떻게든 보이지 않는 나도 알아야만 했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비타민을 구매하고 먹을 수 있지만, 제약회사에서는 그런 상황에 대한 예측이나 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점자를 붙이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방법으로든 그것은 먹지 말아야 한다는 표시를 할 수 있었다. 더 길쭉하게 만들 수도 있었고 병의 벽이나 바닥에 부착을 할 수도 있었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알 수 있는 표시를 제약회사는 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다른 시각장애인들도 충분히 나 같은 상황을 되풀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여전히 안고 있다.

먹지 못하는 것과 먹어야 하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난 비타민과 실리카겔 사이에서 혼동했지만, 누군가는 소화제와 지사제 사이에서 그럴 수도 있다. 지혈해야 하는 약과 아스피린을 반대로 사용할 수도 있고 영양제와 혈압약을 반대로 인식할 수도 있다. 약은 말 그대로 약이기도 하지만 용법을 잘못 이해한다면 독으로 쉽게 변한다.

그렇다고 위험하기 때문에 평생 먹지 않거나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다. 누군가 대신 봐주거나 도와줄 수도 있지만 비상약은 꼭 그럴 때만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그런 것은 누구라도 편히 구분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가장 위험한 것 가장 필요한 것만이라도 모든 이들이 아무 염려 없이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직 살아있음에 감사하다. 그리고 모든 이가 최소한의 의약품 안전을 보장받기를 바란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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