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많은 사람은 때때로 ‘뵈는 게 없어서 무서운 것도 없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 말이 언제 어떤 연유로 우리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채로 살아가는 내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100% 거짓말이다.
그 말이 맞는다면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나에게 ‘겁’이라는 감정은 존재하지 않아야 하지만 난 꽤 겁이 많은 편이다.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사내대장부가 가져야 할 몸가짐에 대해 어릴 적부터 세뇌당한 덕분으로 대담하고 담대한 척하지만 절대 난 그렇지 않다.
험상궂은 아저씨들의 다툼을 볼 때도 공포영화를 볼 때도 스릴감 있는 놀이기구를 탈 때도 난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오싹한 감정을 온몸으로 느낀다. 보이지 않는 것과 겁이 없는 상태가 상당한 관계가 있다면 난 대체로 평온해야 했겠지만, 난 예외 없이 심장박동의 증가와 다리 풀림을 느낀다. 단지 굳은 의지로 사내대장부의 체면을 지키기 위한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얼마 전 영상 촬영 차 체험한 패러글라이딩을 할 때도 친구들과 방문했던 롯데타워 꼭대기의 유리로 된 바닥 위에서도 난 반사적으로 몸을 휘감는 최고 상태의 흥분감을 경험했다. 시각장애인도 고소공포증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난 스스로 시험 도구 삼아 깨달았다. 어떤 이들은 후천적 시각장애를 가진 나 같은 사람들의 또 다른 특성이라거나 혹은 나를 포함한 한두 명에게 존재하는 시각장애를 초월한 예외성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겠지만, 난 앞이 보이지 않는 제자들과 공포영화를 단체로 관람하기도 했고 놀이기구를 타 보기도 했다. 그 경험으로 도출된 연구 결과를 다시 한번 확실히 말하건대 시각장애 집단의 겁 감정은 그렇지 않은 집단의 결과치와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경험으로 돌아보더라도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거나 무서운 장면을 목격했을 때 눈을 가리는 행동이 큰 효과를 발생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영화관에서 눈을 가리더라도 소리 정보는 내가 가진 감정선이 공포상태에 지속해서 머무르게 하고 출렁이는 구름다리 위에서는 눈을 감는 행동이 그 불안함의 강도만 높여줄 뿐이다. 정상적인 전력공급 상태보다 정전상태가 사람들을 평안하게 만들어 주지도 않을뿐더러 밤에 보는 공포영화가 대낮에 시청하는 것보다 몇 배의 오싹함을 주는 것만 보아도 시력의 부재와 겁이 없는 상태는 아무런 상관관계를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난 오늘도 보이지 않지만, TV에서 중계하는 동계올림픽을 보며 흥분하고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 목소리에 반가움을 느낀다. 내가 직접 선수의 움직임이나 친구의 표정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런 감정까지 없어지지는 않는다.
여행이나 낯선 경험을 할 때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내가 겪게 될 시각 정보의 제한에 대해 안타까워하지만, 난 그런 상태에서도 충분히 즐거울 만큼의 다른 대안 정보를 가진다. 때때로 어떤 프로세스가 나를 다른 이와 동등한 수준의 감정변화를 끌어내는 것인지 나조차 모를 때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약간의 다름이 시력이 멀쩡한 사람들과 완벽히 구분되는 단단한 경계를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뵈는 것은 없지만 난 겁이 많다. 보이지 않지만 난 영화를 좋아하고 여행을 사랑한다. 난 조금 다르지만 다른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산다.
[더인디고 THE INDIG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