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차법 시행 14년]② ‘자필서명’에 닫힌 금융거래와 개인정보… 새 정부는 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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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사진 왼쪽)이 서류의 내용을 안내하고 또 다른 사람(사진 오른쪽)이 서류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픽사베이
▲한 사람(사진 왼쪽)이 서류의 내용을 안내하고 또 다른 사람(사진 오른쪽)이 서류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픽사베이

  • 인권위·법원, ‘쓰기’ 어려운 장애인에 서명 강제 “차별”
  • 금융위, 영상·녹음 등 대체방안 마련? ‘생색내기’ 불과
  • 병원 의무기록 열람도 강제… 인권위 통해 해결
  • 대체수단 의무화 등 장차법 개정안 2년째 계류
  • 법 개정 막는 복지부와 금융위… 尹 정부에선?

[조성민 더인디고]

계약이나 개인정보보호 등을 위해 자필서명이 중요해지는 시대지만, 이를 직접 표기할 수 없는 장애인 등을 위한 대책이 미흡해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이어 금융위원회도 지난 2018년 자필서명을 대체할 수단을 마련할 것을 약속한 바 있다. 하지만 법적 강제력 없이 일선 금융기관에 맡기다 보니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평가다.

개인정보보호도 마찬가지. 의료기록 등을 관리하는 병원 등에서도 자신의 의료기록을 열람하려면 자필서명을 해야 한다. 최근엔 한 대학병원에서는 쓰기가 불가능한 장애인에게 이를 무리하게 요구해 정작 정보보호 당사자와 마찰을 빚었다.

정부가 이를 보완하거나 강제화할 방안을 찾기보다는 이해당사자 간에 적절하게 해결할 문제로 떠넘긴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인권위·법원도 쓰기가 어려운 장애인에게 자필서명은 차별 인정금융위는 해결하겠다약속했지만, 현장에선 모르겠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17조는 금융상품 및 서비스의 제공자는 각종 금융상품과 서비스의 제공에 있어서 정당한 사유 없이 장애인을 제한·배제·분리·거부해선 안 된다고 규정했다. 제15조 재화나 용역의 제공, 제20조 정보 접근에서의 차별금지도 마찬가지다.

금융위원회는 2018년 7월이 되어서야 지체장애인이나 시각장애인 등은 녹취 및 화상통화 등 대체수단을 통해 서명 없이도 발급 가능토록 했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장애계 관계자에 따르면 ‘금융위는 장애인단체, 금융감독원, 인권위 관계자 등과 TF를 구성해 여러 차례 회의했고, 또 당시 잘 해결하겠다고 약속까지 했다’고 전했다.

사실 자필서명 대체방안 요구는 훨씬 이전부터 제기됐다. 인권위는 2010년 11월, 글을 쓰기가 어려운 장애인에게 신용카드 발급신청서를 직접 작성하도록 한 것은 차별이라며 금융위원장에게 ‘여신전문금융업법 시행령’ 규정을 합리적으로 개정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당시 금융위는 자필서명이 불가피하고, 다양한 장애 유형을 시행령에 반영하는 것은 어려우니 금감원의 지도, 감독으로 해결하겠다며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후 법원도 지난 2018년 9월, 모 금융기관이 자필서명이 안 된다는 이유로 대출 신청을 거부한 것을 ‘차별’로 판단해 장애인 원고에게 300만원의 손해배상을 지급하라며 화해 결정을 한 바 있다.

하지만 여전히 금융상품에 가입할 때는 누구나 10회 내외의 자필서명을 해야 한다. 보험계약은 ‘덧쓰기’까지 할 때도 있다. 전화나 온라인으로 신용카드 발급을 신청했더라도, 막상 자택이나 회사 등에서 수령 할 때는 자필서명을 여러 차례 해야 한다. 말이 좋아 전화나 온라인 신청일 뿐이라는 것.

▲보험계약서 서명날인 ©더인디고
▲보험계약서 서명날인 ©더인디고

실제 현장에선 금융상품 가입 과정에서 녹취나 영상으로 대체해달라고 해도 금융기관 관계자는 “그런 내용 자체를 모른다”라거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지만 녹음이나 영상 등을 신청서류와 별도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갖추지 않았다” 혹은 “문제가 발생하면 자신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식으로 거부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국내 대형 보험업 관계자도 더인디고와의 전화 통화에서 “회사 차원에서 관련 교육을 한 적도 없다. 또 인쇄물로 된 계약서가 아닌 태블릿PC 등을 활용해 계약을 진행하는데, 관련 녹음이나 영상을 연계할 수 있는 시스템도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전 조사지만 2017년 한국금융연구원이 수행한 ‘장애인 금융이용 차별 개선을 위한 실태조사 및 시사점 분석’ 연구에 따르면, 카드 신청 시 장애로 인해 음성통화, 직접 서명 등 본인확인이 안 돼 카드발급 신청이 중단되거나 거절된 경험이 있다는 응답자가 19.3%에 달했다. 대출 신청 시 본인확인이 안 되어 대출 신청이 중단되거나 거절된 경험이 있다는 응답자도 14.6%인 것으로 조사됐다.

내 정보조차 못 보는 진료기록’… 불이익 주겠다는 개인정보보호법

문제는 이러한 자필서명의 문제가 금융기관에서만 발생하는 것일까?

갈수록 개인정보보호를 엄격하게 하는 추세에서 정작 장애인 당사자는 자신의 정보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대구 지역 다릿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이민호 권익옹호 팀장에 따르면 장애 정도가 심한 A씨는 지난 2021년 4월 7일, 의무기록 사본을 발급받기 위해 대구 모 대학병원을 방문했다. 병원 측 관계자는 신청서에 자필서명을 요구했고, A씨는 양팔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병원 측이 흉내라도 내라고 강제하자 A씨는 대구15771330장애인차별상담전화네트워크의 지원을 받아 인권위에 집단진정서를 제출했다. 이후 차별 발생 꼭 1년만인 지난 7일, 해당 병원은 지침을 변경하겠다고 인권위를 통해 알렸다.

하지만 어느 한 병원만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의료법 시행규칙을 개정해 모든 병원에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의료법 시행규칙 제13조의3에 따르면 열람 요건에 필요한 서류 중 만 14세 미만의 미성년자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별지 제9호의 2서식>의 ‘진료기록 열람 및 사본발급 동의서’에 환자의 자필서명이 있어야 한다. 만 14세 미만의 미성년자는 법정대리인이 대신 작성토록 했다.

보건복지부가 현행 의료법 시행규칙을 ‘자필서명이 불가능한 장애인일 경우 별도 진단서 등의 제출 없이 환자 본인이든 친족이 대신 열람하든 적용 제외를 하든가 병원이 대체방안을 마련’토록 하면 될 문제라는 의견이다.

▲의료법 규칙에 따라 대부분 병원은 의료기록 사본 발급 시 ‘환자 동의를 받을 수 없는 경우’를 구분한 후 해당 증빙서류를 요구하고 있다. /사진=국립중앙의료원 홈페이지 캡처
▲의료법 규칙에 따라 대부분 병원은 의료기록 사본 발급 시 ‘환자 동의를 받을 수 없는 경우’를 구분한 후 해당 증빙서류를 요구하고 있다. /사진=국립중앙의료원 홈페이지 캡처

현재 국립중앙의료원을 비롯한 병원들은 환자가 ‘의식불명 또는 중증의 질환부사상자, 혹은 의사무능력자인 경우’ 등으로 한정했고, 게다가 이를 입증할 별도의 진단서 등을 제출토록 했다.

개인정보보호법도 마찬가지다. 제15조(개인정보수집,이용)과 24조(고유식별정보의처리제한)에 따라 ‘동의’를 하지 않는 경우 불이익을 강조한 데 이어 ‘반드시 자필서명 후 제출’하도록 의무화했다.

금융거래 중심으로 장애인차별금지법 개정안 발의… 2년째 계류 중

이처럼 금융상품 가입이나 개인정보보호에 따라 이루어지는 ‘자필서명’은 그 자체로 계약과 정보열람 등에서 장애인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꼴이다. 결국 문제 해결에 있어서 정부는 뒷짐만 지는 사이, 장애인은 현장에서 싸워 해결하거나 인권위와 법원 판결 등을 통해 구제받는 형국이다.

21대 국회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 개정안이 발의된 상태다.

더불어민주당 김영호 의원과 진성준 의원은 지난 2020년 9월 ‘장애인의 금융상품 및 서비스 이용 시 본인인증 방법 다양화’를 목적으로 장애인차별금지법 제17조에 별도 조항을 신설하는 것으로 개정안을 발의했다.

김영호 의원안은 금융상품 및 서비스의 제공자가 장애인을 위해 본인인증 방법 다양화 등의 편의를 제공하도록 했다. 진성준 의원안은 자필서명이 어려운 장애인에게 녹취 또는 영상녹화 등 본인의 의사를 확인할 수 있는 대체수단을 제공하도록 의무화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는 본인인증 방법 다양화 등 정당한 편의 제공을 의무화할 경우 금융상품 및 서비스 제공자에게 과도한 부담이 따를 수 있으므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국회에 제출했다. 사실상 장애인차별금지법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가 ‘과도한 부담’을 이유로 부정적 의견을 냈다는 점에서 비판이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원회도 ‘소규모 금융회사까지 편의를 제공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은 다소 과도한 측면이 있다’는 의견을 국회에 냈다. 지난 2018년 장애인단체와 인권위 등과 협의를 거쳐 대체수단을 마련했다고 대대적 홍보를 했지만. 결국 생색내기라는 것을 금융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이제 윤석열 정부 5년의 시작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5월 말이면 21대 국회 후반기 상임위도 결정된다.

새로운 정권과 달라지는 국회, 장애인의 삶도 어떻게 변할지 지켜볼 일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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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인디고 대표] 20대 80이 경제적 불평등의 상징이라면,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 20은 권력의 불평등을 뜻하는 숫자 아닐까요? 20의 다양성과 차이를 함께 나눔으로써, 80대 20이 서로를 포용하며 보듬어가는 미래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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