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경의 컬처 토크] 특별하지 않아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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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 단팥인생이야기(2015). 사진=배리어프리버전 예고편 유튜브 화면 캡처
▲앙: 단팥인생이야기(2015). 사진=배리어프리버전 예고편 유튜브 화면 캡처
  • 영화 <앙(An), 2015>

[더인디고=차미경 편집위원]

차미경 편집위원
▲차미경 더인디고 편집위원

해마다 세밑이면 마음이 덜그럭거리곤 한다. 한 해 동안 치열했던 삶의 전장에서 전리품들을 챙기느라 미처 모르고 지나쳤던 무수한 생채기들을 새삼 핥으며 생의 쓸쓸함과 허무에 짐승처럼 웅크리는 시간. 누구에게라도 이즈음은 바로 그런 때가 아닐까. 한껏 움츠려 있던 날 누군가 내미는 따뜻한 손처럼 이 영화를 만났다. 키키 키린 주연의 영화 <앙>.

앙, 앙은 무언가를 베어 무는 아이나 동물의 귀여운 몸짓이 아니다. 흔히 앙꼬 없는 찐빵이라고 표현할 때 팥으로 만든 그 앙꼬, 바로 팥소를 말하는 것이다. 평생 시설에 갇혀 팥소를 만들었던 도쿠에 할머니가 죄책감과 무력감에 갇혀 사는 젊은이 센타로를 만나 그에게 그녀만의 팥소 만들기를 전수하는 이야기다.

벚꽃이 아름답게 흩날리던 날, 일본 단팥빵 도라야끼를 파는 센타로의 작은 가게 앞에서 벚꽃을 따라 걷던 도쿠에 할머니의 걸음이 멈춘다. 가게 안엔 발랄한 학생들의 웃음이 가득한데 어둡고 권태로운 표정의 센타로만이 웃지 않고 습관처럼 도라야끼 빵을 뒤집고 있다. 가게 앞에 붙은 알바구인 광고를 본 도쿠에 할머니는 센타로에게 자기를 채용해 줄 수 없겠느냐고 수줍게 제안한다. 정한 시급 600엔에도 훨씬 못 미치는 200엔만 받고 일하겠다며 채용을 부탁하는 할머니에게 센타로는 차마 그럴 수는 없다며 거절해 보낸다.

체념한 듯 가버렸나 싶던 할머니는 며칠 후 다시 나타나 센타로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팥소를 맛보여 주고는 센타로의 팥소에 대해 묻는다. 도라야끼를 팔긴 하지만 팥소는 만들어진 제품을 구매해 사용하는 센타로의 상황. 결국 센타로는 도쿠에 할머니에게 팥소를 부탁하는 것으로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가 시작된다. 평생 팥소를 만들어 온 팥소 장인의 팥소 전수 과정은 그렇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흔하디흔한 음식 영화의 또 다른 변주처럼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우리가 흔히 ‘문둥병’이라 부르던 한센병 환자의 외면당한 삶을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만의 특별함이 있다.

도쿠에 할머니는 한센인이었다. 어린 시절, 나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오빠에 의해 격리시설에 맡겨진 이후로 다시는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평생을 시설에 갇혀 지내다가 늙어서야 비로소 처음 세상 밖으로 외출할 수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설렘과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흩날리는 벚꽃길을 꿈처럼 거닐던 할머니의 표정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도쿠에 할머니의 팥소 덕분에 센타로네 가게는 날개 돋치듯 팔리는 도라야끼의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한 소녀의 작은 실수로 도쿠에 할머니가 한센인이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가게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고 만다. 그렇지 않아도 할머니의 비밀을 알고 있던 가게 주인은 센타로에게 도쿠에 할머니를 더이상 가게에 못 나오게 하도록 종용하던 차였다. 한때 실수로 감옥에 가게 된 센타로에게 거액의 합의금을 빌려준 것이 가게 주인이기 때문에 지금껏 센타로는 빚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였다.

도쿠에 할머니가 알아본 것은 바로 센타로의 그 무기력하고 슬픈 눈빛. 길을 지나다 센타로의 그 눈빛에 이끌려 그에게 다가갔노라고 그녀는 유언을 통해 이야기한다. 그 눈빛이 어린 날 갇혀 있던 자신의 눈빛을 닮아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노라고.

평생 한센병으로 격리되어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도쿠에는 그렇게 죄책감과 무력감에 묶여 껍데기처럼 살았던 젊은이를 구원하고 떠났다. 그런 깊고 따뜻한 눈을 가진 도쿠에 할머니 역은 배우 키키 키린이 했는데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녀만큼 도쿠에 할머니 역을 잘 해내지 못했을 것 같다. 보는 내내 키키 키린이 그려낸 도쿠에 할머니는 한없이 눈물겨웠다. 특히 이 영화에는 키키 키린의 친손녀, 우치다 카라(와카나 역)도 함께 출연해 더욱 생생함을 더했다.

단 걸 싫어하면서도 단 팥소를 만들고, 술집을 하고 싶은데 도라야끼를 팔아야 하는 센타로. 어쩌면 우리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에 묶여서 하루치만큼의 힘겨운 허들을 가까스로 뛰어넘으며 생의 기쁨도 보람도 없이 좀비처럼 살아내고 있는, 어찌 보면 다 그런 삶인지도 모른다.

그런 센타로의 슬픔을 알아봐 주고, 생에 진심을 다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이며 센타로를 위로하고 떠난 도쿠에 할머니. 그녀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 듣기 위해 태어났어.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해도, 우리 각자는 모두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야.”

실로 도쿠에 할머니만이 할 수 있는 위로가 아닌가. 평생 갇혀 살면서 팥소를 만드는 것이 유일한 일이었던 사람, 다 문드러져 뭉뚝해진 손으로 팥소를 만들며 모든 정성과 진심을 담았던 사람, 팥들에조차도 진심으로 귀 기울이고 말을 걸던 사람, 도쿠에 할머니. 존재 자체로 존재의 가치를 입증한 그녀만이 가질 수 있는 위로의 자격이다. 세상에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은 ‘특별함’이 아닌 생에 쏟은 진심과 정성으로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다. 도쿠에 할머니가 온 삶으로 전한 메시지다.

그러니 나 자신에게 다시 물어야겠다.

올해 특별했던 내 성과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삶이든 매순간 얼마나 진심과 정성을 다해 삶에 귀 기울였는지를.

[더인디고 THE INDIGO]

라디오 방송과 칼럼을 쓰고 인권 강의를 하면서 나름의 목소리로 세상에 말을 걸어왔습니다. ‘easy like Sunday morning...’ 이 노래 가사처럼 기왕이면 일요일 아침처럼 편안하게 문화를 통한 장애 이야기로 말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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