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경의 컬처 토크] 나를 잃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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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dementia)라는 글자가 쓰인 도로와 퍼즐 조각으로 이뤄진 하늘 ⓒ픽사베이
▲치매(dementia)라는 글자가 쓰인 도로와 퍼즐 조각으로 이뤄진 하늘 ⓒ픽사베이
  • 영화 ‘카시오페아’(2022) & ‘스틸 앨리스’(2015)

[더인디고=차미경 편집위원]

차미경 편집위원
▲차미경 더인디고 편집위원

모든 것이 상실되는 순간에도 한 사람을 가장 그 사람답게 만드는 최후의 요건은 무엇일까? 그만이 가진 특별한 재능이나 지식? 그가 이루어 낸 성공? 그가 쌓아온 특별한 경험과 지혜? 그가 맺어온 모든 인간관계?… 과연 이런 것들이 그 사람을 가장 그 사람답게 하는 조건이 될 수 있을까? 물론 그 사람을 이루는 각각의 요소는 될 수 있겠지만 본질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한 사람을 가장 그 사람답게 만드는 요건일까? 영화 ‘카시오페아’와 ‘스틸 앨리스’를 통해서 생각해 본다.

두 영화는 둘 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렸다.

영화 ‘카시오페아’의 수진(서현진)은 대형 로펌의 유능한 변호사로 이혼 후 딸을 키우며 사는 37세 싱글맘이다. 그러나 딸의 유학을 준비하던 중 초로기 알츠하이머를 진단받게 된다.

또 영화 ‘스틸 앨리스’의 앨리스(줄리안 무어)는 콜롬비아대학의 명망있는 언어학 교수로서 교수인 남편과 자녀 셋을 둔 평범한 가정의 엄마다. 그녀 역시 알츠하이머에 걸렸다.

알츠하이머, 즉 우리가 흔히 아는 치매에 걸린 두 주인공 수진과 앨리스는 처음엔 아주 사소한 기억이나 낱말을 잊어버리다가 결국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자기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간단한 신변처리조차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없게 되는 데까지 이르고 심지어 옷을 입은 채 실금을 해 버리는 실수까지. 한창인 나이의 두 여자가 알츠하이머로 겪는 증상들이 안타깝게 그려진다.

두 영화가 같은 알츠하이머를 다루었지만 ‘카시오페아’의 수진을 보고 있으면 일종의 어떤 공포감마저 든다. 저렇게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 치매라는 병에 의해 저렇게 비참하게 망가지는구나. 수진에게 닥쳐 그녀를 활활 불태우는 불행의 불씨가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도 번져 올 것만 같은 그런 공포, 어쩌면 보험 광고에서 익히 접한 그런 공포감 말이다.

TV를 켜두고 있으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오는 보험 광고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질병 치매! 광고만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치매만큼 무서운 병이 없다. 광고에 의하면 보험 하나 들어두지 않고 치매에 걸렸다가는 세상에 그런 민폐가 없고 천하에 그런 죄인이 따로 없다. 보험 가입을 늘리기 위해 광고는 장애와 질병에 대한 공포심을 최대한 자극한다. 그러나 장애와 질병은 오롯이 개인이 책임지고 감당해야 할 공포가 아니다.

영화 ‘카시오페아’에서 수진의 알츠하이머로 인한 고통은 오롯이 수진의 아버지(안성기)가 감당한다. 기억과 자기 통제력을 잃어가는 딸을 옆에서 지키며 고통스러워하는 늙은 아버지의 모습은 어쩐지 감동이기보다 보험 광고가 심어준 그 익숙한 공포심이 먼저 떠오른다. ‘카시오페아’라는 제목 역시 길을 잃지 않도록 밝혀 주는 제일 밝은 별로서 수진의 아버지를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스틸 앨리스’의 앨리스는 어떨까. 앨리스 역시 모든 기억과 자기 통제력을 안타깝게 잃어간다. 그러나 ‘카시오페아’의 수진처럼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시련 앞에 무너지지 않는 한 인간의 고결한 품격이란 무엇인가가 더 절실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앨리스 역시 가족이 돌보지만 앨리스를 돌보느라 가족이 전적으로 희생하거나 희생을 강요받지도 않는다.

“제가 고통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전 애쓰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예전의 나로 남아 있기 위해서죠.
순간을 살라고 스스로에게 말을 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순간을 사는 것과
스스로를 너무 다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상실의 기술을 배우라고
스스로를 밀어붙이지 않는 것입니다.”

앨리스가 치매 환자와 그 가족들 앞에서 치매 당사자로서 연설하는 장면에 나온 대사다. 이 대사가 감독이 전하고 싶었던 이 영화의 주제인지도 모르겠다. 감독 리처드 글렛저 역시 루게릭을 앓으면서 ‘상실’을 경험하는 당사자이기도 했다. 그는 이 영화가 개봉한 이듬해 향년 6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영화 제목이 말하듯 모든 기억을 다 잃어도, 이전 앨리스의 모습이 아니어도 앨리스는 ‘여전히 앨리스’인 것이다.

딸 리디아가 읽어주는 책 속의 문장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딸이 무슨 내용이냐고 묻자 ‘사랑’이라고 답하는 앨리스의 모습. 영화의 엔딩이다. 모든 것을 다 잊어도 최후까지 잊지 않는 사랑. 그것이 어쩌면 한 인간을 가장 그답게 하는 최후의 본질이 아닐까.

[더인디고 THE INDIGO]

라디오 방송과 칼럼을 쓰고 인권 강의를 하면서 나름의 목소리로 세상에 말을 걸어왔습니다. ‘easy like Sunday morning...’ 이 노래 가사처럼 기왕이면 일요일 아침처럼 편안하게 문화를 통한 장애 이야기로 말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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