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호의 차별 속으로] 민주주의는 저상버스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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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상버스 안에 휠체어를 탄 사람이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김소하 작가
▲저상버스 안에 휠체어를 탄 사람이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김소하 작가

[더인디고=이민호 집필위원]

이민호 집필위원
▲이민호 더인디고 집필위원

오늘 장애인 인권침해 시설 폐쇄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하기 위해 518번 저상버스를 탔다. 신체적 장애로 인해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 나는 계단이 있는 버스는 탑승할 수 없다. 차체가 낮고 출입구에 계단 대신 경사판이 나오는 저상버스라면 이용할 수 있다. 저상버스는 계단이 없기에 아이와 노인들이 오르내리기 쉬우며, 무거운 짐을 가진 승객에게도 유리하다.

모두가 탈 수 있는 저상버스는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말하는 민주주의와 닮아있다.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모두에게 권리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탄 것은 저상버스가 아니라 민주주의다.

실제로 민주주의는 버스를 타고 다닌다. 바로 518번과 228번 버스이다. 228번은 1960년 2·28일 대구민주화운동을, 518번은 1980년 5·18일 광주민주화운동을 상징하며 서로의 도시를 누비고 있다.

광주와 대구는 2013년부터 두 도시 옛 이름(달구벌·빛고을)의 첫 글자를 딴 ‘달빛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지역 간 교류사업을 함께 해오고 있는데, 2018년 달빛동맹위원회에서 “대구에 518번 버스가 있는데 광주에도 228번 버스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제안이 동기가 되었다.

하지만 대구광역시의 시내버스 저상버스 도입률은 2022년 기준으로 47.9%에 불과하며, 저상버스 관리 등의 문제로 실 운행률은 39%로 더 낮아진다. 게다가 저상버스의 특성상 급경사 및 높은 과속방지턱 등의 도로 구조에 의해 일부 노선은 도입이 불가하며, 현재 대구 시내버스 전체 121개 노선 중 20개 노선이 저상버스 미운영 중이다. 평균적으로 10대 중 5대가 저상버스가 아니다. 저상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비교통약자보다 2배나 더 많은 시간을 길에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저상버스가 없는 노선에서는 탑승이 불가하다.

국토교통부는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시행령·시행규칙’에 따라 시외버스를 제외한 노선버스를 대·폐차할 때 반드시 저상버스를 도입하도록 했고, 의무 도입으로 인해 전국 시내버스의 저상버스 도입률은 2021년 30.6%에서 2026년 62%로 증가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100%를 목표로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삼대가 덕을 쌓았는지 20분도 채 되지 않아 저상버스가 들어왔다. 아지랑이를 뚫고 달려오는 버스는 흡사 전설의 동물 ‘유니콘’ 같았다. 도착한 버스는 정류장 가까이 정차한 뒤 능숙하게 리프트를 펼쳤다.

버스에 오르고 보니 예전에 몇 번 만났던 기사님이셨다. 타자마자 접이식 의자를 접어주시며 도착지가 어딘지 물어봐 주셨다. 속된 말로 “기분이 째졌다” 무더운 날씨에 목적지에 편하고 빨리 갈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핸드폰 화면에 나온 뉴스를 접하자 째졌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얼마 전 한국이 개도국에서 선진국이 되었다는 뉴스 때문이다. 선진국인 독일·영국·덴마크·캐나다 등에서는 1990년대 초부터 저상버스가 일반화되었지만, 한국은 이제 시작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말만 선진국이다. 일본은 1997년부터 도입했다고 하는데 축구 말고 저상버스 도입률을 가지고 한·일전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다음에 내릴 준비 하라는 기사님의 목소리가 상상에 빠져있던 나를 현실 세계로 소환했다. 버스에서 내려 급히 학교로 향했다. 교육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를 관통하는 이동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이동 수단의 확장은 나에게 더 큰 세상을 열어주었다. 학교에 가게 해주었고, 직업을 가지게 해주었다. 더디지만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헌법과 민주주의에서 말하고 있는 집회 결사의 자유와 만나게 해주었다. 시민의 한 사람인 내가 자유권, 평등권, 교육권, 문화향유권, 노동권과 같은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권리를 위한 권리’가 바로 이동할 권리, 즉 ‘이동권’이다.

이동권이라는 단어는 2001년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참사 사건을 계기로 장애인 당사자들이 투쟁을 통해 만들어낸 신생어이다. 올해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 22주년 되는 해이다. 하지만 장애인 당사자들에게 완전한 이동권 보장은 멀고 먼 이야기이다.

법 제정 이후 마련된 ‘제1차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 계획’상으로 2011년까지 전체 시내버스의 31.5%를 저상버스로 교체해야 했고, ‘제2차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 계획’상으로는 2016년까지 41.5%를 저상버스로 교체했어야 했다. 하지만 현재 저상버스 보급률은 28.4%에 불과하다. 즉 한국의 저상버스 보급률은 국가 계획에 따라 10년 전 달성 목표치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교통약자의 의미는 장애인, 고령자, 임산부, 어린이 등을 포함하여 일상생활에서 이동 불편을 느끼는 사람을 말하는데 전체인구(5,183만 명)의 약 29.7%인 1,540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장애인만을 위한 문제가 아니라 시민의 문제라는 뜻이다. 이에 장애인 시민들은 2023년은 518광주민주화항쟁 43주년을 맞이하여 거리에 나왔다.

‘장애인에게 민주주의는 없었다’라고 외쳤다. ‘장애인도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할 권리가 있다’라고 외쳤다. 43년 전 그날이 재현되었지만, 주인공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비뚤어져 한쪽이 된 장애인들이 그 주인공이었다. ‘몸’과 ‘목소리’, 그 자체로 민주주의에서 말하고 있는 다양성을 드러냈다.

이제 모든 장애인의 ‘몸들’과 ‘목소리들’이 저상버스라는 민주주의에 함께 타길 원한다. 저상버스를 통해 모든 시민의 민주주의가 실현되길 바란다. 대구의 모든 시민이 광주의 228번 버스를 광주의 모든 시민이 대구의 518번 저상버스를 타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오늘도 나의 민주주의는 버스를 타고 달린다.

[더인디고 THE INDIGO]

대구 지역 다릿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권익옹호 팀장으로 활동하는 장애인 당사자입니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장애 인권 이슈를 ‘더인디고’를 통해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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