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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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품 전시회 /사진=픽사베이
▲미술작품 전시회 /사진=픽사베이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내가 가는 길에 함께하게 되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팔꿈치 한쪽을 내어준다. “별일 아니야.”, “이 정도 도움이라면 언제든지!”라고 이야기하곤 하지만 같이 다닐 때마다 매번 안내자가 되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은 아니다. 더운 날에 따뜻한 손도 추운 날에 차가운 손도 유쾌할 리 없지만 때때로 상황에 따라서는 더러운 손의 접촉도 감수해야 한다. 시각장애인 관점에서야 가볍게 쥐고 따라간다고 하지만 오래 걷는다거나 위험한 상황을 마주할 때 자신도 모르게 꽉 쥐게 되어 통증을 선물하기도 한다.

시력을 가진 이가 보이지 않는 이에게 길 안내해 주는 것은 특별히 인성 나쁜 사람 아니고서야 당연함을 넘어서 의무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작은 도움도 분명히 내 것 나누는 배려임이 틀림없다.

회식 자리에서 나와 같은 식탁 앉은 이들이 수저를 놓아주는 것도 반찬의 위치를 설명하는 것도 고기를 굽고 더러운 것들을 대신 버려주는 것도 일상적으로 내가 받게 되는 익숙함이지만 그것들은 분명 그들이 나와 함께 하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어도 될 또 하나의 배려이다. 일반적인 환경에서 시각장애인 아닌 이들은 나 같은 사람들에 비해 빠르고 쉽게 일을 수행할 수 있으므로 난 거의 온종일을 배려받고 양보받으면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길 가다 떨어뜨린 물건을 누군가는 주워주고, 밖으로 나가서 사 와야 하는 물건은 사무실에 있는 나 아닌 다른 동료의 움직임으로 해결된다. 단체대화방에 올라오는 채팅에서 사진으로 올리면 간단히 소통할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나를 고려하여 기다란 설명을 붙여 주고 함께 보는 공연이나 영화 장면은 자신의 몰입을 조금 양보하면서까지 내게 화면해설 해 준다. “친구라면, 가족이라면, 함께 살아간다면 그 정도야 당연한지.”라고 말할 수 있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내가 도움을 받고 배려받고 있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얼마 전 유명한 화가의 미술 전시회에 지인들과 함께 다녀왔다. 여느 때 같으면 함께 한 이들은 내 시력을 고려하여 미술관 같은 곳을 만남의 장소로 정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번엔 기획한 분의 초대로 이루어진 모임이었기에 그들도 특별한 미안함이나 장소 변경의 고민 없이 나와의 미술관행을 함께 했다. 현대미술답게 멋진 음향과 다양한 표현들이 있었으므로 기존의 전시장에 비해서는 스스로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들이 존재하긴 했지만, 냉정히 말하자면 미술작품과 시각장애인의 사이는 좋아지기가 쉽지 않았다.

내게 한쪽 팔을 내어준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최선을 다해 벽에 걸린 작품들을 묘사하고 설명했지만 눈 보는 이가 스스로 느끼는 감흥을 온전히 내게 전해주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하품과 지울 수 없는 지친 표정 때문이었는지 미술관에서 나온 지인들은 내게 미안한 맘을 가지는 것 같았다.

나도 충분히 즐겼다고 예의 담은 이야기를 했지만 지루해 보이는 내 태도 목격한 이들이 그런 말에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정말이에요. 다음번에 또 미술관 가요. 마임도 보고요.”라며 껄껄 웃었지만 내 말을 농담 이상으로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재미있는 시간이 아니긴 했다. 애쓰고 내게 들려준 설명들이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그런 설명이 감상이라면 미술관까지 오지 않더라도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다. 인터넷 서핑을 해도 되고 관련된 책을 읽는 편이 어쩌면 더 나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그날의 일정을 함께한 것은 그것은 내게 주어진 배려의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와 함께 하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양보하고 배려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기도 하고 자신의 에너지를 써서 나를 돕기도 한다. 난 그로 인해 조금 덜 불편하고 조금 더 즐겁게 살아간다.

미술관 방문은 나에게 있어 그런 배려를 돌려줄 귀한 기회가 되었다. 난 다른 곳에 가는 것이 더 좋았지만 초대한 이와 함께 감상할 지인들을 배려하여 그 자리에 함께하면 되었다. 내 시간을 양보해야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 내가 양보받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 나의 욕구를 내려놓아야 했지만, 많은 장면에서 나를 위해 그들이 내려놓았던 그 욕구였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늘 배려만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조건이 변하지 않는 한 난 오늘도 또 내일도 많은 배려를 받으며 살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되돌려 줄 수 있는 배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미술관에도 갈 수 있고 마임도 볼 수 있다. 조금 느리긴 하겠지만 때때로 심부름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안내할 수도 있다. 기회가 많을지 모르겠지만 할 수 있을 때 나도 나의 에너지와 시간을 다른 이들을 위해 배려하고 싶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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