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보조배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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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마트폰을 충전하고 있다. ⓒ픽사베이
▲ 스마트폰을 충전하고 있다. ⓒ픽사베이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스마트 기기의 기능이 향상되고 발전되면서 장애를 가진 내 삶의 불편함은 점점 줄어가고 있다. 스마트폰과 무선이어폰이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새로운 뉴스를 받아 볼 수 있고 필요한 도서를 찾아 읽기도 한다. 옷이나 물건의 색이 궁금할 때도 문서에 쓰여 있는 글자정보를 알고 싶을 때도 OCR 앱과 카메라 기능을 이용하면 눈이 보이는 사람처럼 읽어낼 수 있다.

국민 메신저인 카톡을 사용하고 메시지 주고받는 일은 벌써 오래전부터 가능한 일이었지만 블루투스 키보드가 있다면 좀 더 편하게 활용할 수 있다. 택시 안에 있는 나의 이동 경로를 알고 싶을 때도 오늘의 날씨와 미세먼지 농도가 궁금할 때도 배달 음식을 주문할 때도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도 내 손에는 언제나 스마트폰이 들려져 있다. 일주일마다 한 번씩 도착하는 주간 사용 시간 알림을 보다 보면 스마트폰 없던 때의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가 궁금할 만큼 나의 삶은 스마트 기기 없이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토록 많은 시간 기기의 도움을 받는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필수품이 되어 버린 것이 있으니 바로 보조배터리이다. 아무리 똑똑한 기기가 있다 하더라도 전원이 꺼진다면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난 항상 날 돕는 녀석들의 배고픔의 상태를 체크한다. 이전엔 정말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조차 흐려졌지만, 지금의 내가 만약 어느 길을 헤매다 스마트폰이 꺼진다면 난 지도를 볼 수도 없고 택시도 부를 수 없는 상황에 극도의 불안감을 느낄 것이다.

지나는 이라도 있다면 도움을 청하겠지만 그조차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라면 구조요청 전화도 할 수 없게 된 나는 막연한 방향감각에 의지한 채로 확신 없는 길을 기약 없이 걸어가야만 한다. 길거리 상점의 간판이라도 읽을 수 있다면 편의점이나 카페에 들어가 잠시간의 충전을 부탁할 수도 있겠으나 보이지 않는 내게 그것은 쉬운 과제가 아니다.

그런 이유로 인해 내 가방에는 보조배터리가 항상 들어 있다. 5,000 mA로 시작된 용량도 기기의 숫자가 늘어나고 사용 시간이 늘어나면서 10,000 mA를 거쳐 20,000 mA까지 그 용량과 크기를 늘렸다. 사무실에도 식당에도 기차 객실까지 어디를 가도 콘센트를 볼 수 있는 요즘 환경에 그렇게 큰 배터리가 필요하냐고 묻는 이도 있지만 바로 옆에 있는 벽에 무엇이 있는지도 만져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내 상황은 스스로 전기를 준비하는 쪽을 택했다.

어느 기기라도 갑자기 동작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 있어 너무도 큰 불편함이기에 난 혹시라도 내 주변의 누군가 내 배터리를 빌려 쓴다거나 예상 못 한 보조배터리 방전의 상황까지도 대비해야만 한다.

그런 내가 며칠 전 그 배터리를 놓고 외출하고 말았다. 멀리 가야 하는 일정이 있는 날이라 조금이라도 더 충전한다고 콘센트에 꽂아놓았는데 급히 나오다 보니 순간적으로 그것을 잊은 것이다. 일이 그리되려다 보니 때때로 들고 다니던 여분의 작은 보조배터리마저 같은 신세로 집 콘센트에 얌전하게 꽂아두고 나와버렸다.

당장 휴대전화가 꺼지는 것도 아닌데 키보드가 동작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일어나지도 않은 불안한 상황들이 상상되고 걱정되어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재미있게 읽던 책을 오가는 길에 읽고 싶었지만, 혹시 모를 사건 때문에 꾹 참았다. 잠시 어딘가라도 머무를 땐 많이 닳지도 않은 배터리의 충전을 부탁했다.

할 일도 못 하고 궁금한 것은 억누르고 그날 할 일을 겨우겨우 소화하긴 했지만 불편하고 답답하고 힘들었다. 원래 보이지 않던 눈인데도 괜스레 더 불편해진 것 같고 하루를 끝내는 기분이 상쾌하지 않았다. 스마트 기기로 인해 내 삶이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보조배터리 하나 들고나오지 않은 사건은 그 모든 편리함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오직 첨단의 기기들 덕분에 업그레이드되었다고 생각했던 내 삶은 보조배터리의 역할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보조배터리는 스스로 화려한 기능을 수행하려 하지 않는다. 기기의 목적은 더 많은 양의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충전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오롯이 다른 기기에게 전기를 나눠주려 함이다. 빠르게 충전하는 것도 빠르게 내보내는 것도 스스로를 도드라져 보이게 하려 했던 것이 아니므로 첨단의 스마트 기기들에 가려져 그 역할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시기적절하게 때마다 스스로를 나누는 보조배터리가 없었다면 내 삶의 편리함은 그 크기를 줄였거나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휴대전화는 여전히 내게 매력적인 선택지였겠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충전을 고민해야 하는 나의 사용패턴은 보조배터리가 없었다면 그 사용 자체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했을 것이다.

난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생각해 보면 나를 둘러싼 지원의 손길들은 나에게 있어 보조배터리 같은 존재들이다. 드러나지 않지만, 묵묵히 지지하고 도와주는 보조배터리형 사람들이 없었다면 장애 가진 내 삶은 조금 더 불편했거나 덜 불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했을지 모른다.

처음 장애를 가졌을 때 어쩌면 그 이전부터 가족은 언제나 나의 보조배터리였다. 나의 학창 시절 필기를 나누고 강의실을 안내해 주던 동기들도 내겐 보조배터리였다. 시력 없이 수행하기 힘든 일을 대신 해 주던 직장동료들도 길 잃은 나를 바른길로 안내해 주던 어느 길에서의 아주머니도 분명 내겐 보조배터리였다.

나와 평생을 같이 하기로 약속한 내 아내도 이제부터 내 삶에 있어 너무도 든든한 보조배터리가 될 것이다. 첨단의 기기는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그럴수록 많은 전기와 배터리 용량이 필요하다. 기본으로 붙어있는 배터리가 그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은 듯하다. 내 삶의 경계가 넓어지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아지는 내 주변에도 보조배터리 인간관계들이 늘어간다. 의식하고 감사하려 의지를 가지지 않으면 언제 어느 때 보조배터리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낄지 모른다.

내가 오늘도 첨단의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것은 가방 속 든든한 보조배터리 덕분이다. 나의 오늘이 존재할 수 있는 것 또한 내 주변의 보조배터리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보조배터리가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서로 방전되지 않고 나아질 수 있는 길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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