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눈앞이 캄캄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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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으로 모든 건물에 불이 커진 상태에서 자동차만 불을 밝힌 채 달리고 있다. 픽사베이
▲정전으로 모든 건물에 불이 커진 상태에서 자동차만 불을 밝힌 채 달리고 있다. 픽사베이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내가 어릴 적엔 심심치 않게 정전을 경험했다. 미리 예견되는 일도 있긴 했지만, 대체로는 아무런 전조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드문 일이 아니었으므로 초를 찾고 두꺼비집을 열고 이웃집의 사정을 살피는 어른들의 행동에서 큰 당황스러움이나 어려움 같은 것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겐 말 그대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일이었다. 가지고 놀던 장난감도 찾을 수 없었고 물 한 모금 마시러 가는 것도 화장실에 가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무섭고 두렵고 막막했다. 부랴부랴 아버지가 찾으신 촛불이라도 켜지면 조금은 안심이 되었지만, 작은 불빛으로 마음의 불안함이 완전히 해소될 수는 없었다. 여전히 눈앞은 캄캄했고 이 공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정전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다행히 그 상황은 아주 길게 지속되지는 않았다. 오래전 일이라 뭐가 먼저였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다시 들리고 아날로그 텔레비전에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나고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날 때쯤 형광등도 껌뻑거리며 다시 환한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아무렇지 않아 하던 다른 어른들의 심정도 사실은 나와 비슷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불이 켜질 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들렸다. 우리 집도 그랬지만 골목에 나와 있던 다른 어른들도 그랬다.

불이 켜지고 찬찬히 바라보는 내 앞은 어둡기 전의 상황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전에도 그랬겠지만 어두웠을 때도 별다른 것은 없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눈앞이 캄캄해졌을 뿐 눈앞의 것이 없어지거나 변한 것은 아니었다. 장난감도 음료수도 화장실도 그대로였다. 내 눈앞이 어두워졌을 뿐 난 놀 수 있고 물을 마실 수 있고 화장실에 갈 수도 있었다.

실제로 조금 더 자란 어느 날부터인가는 갑자기 불이 꺼지더라도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전기가 끊어지는 것이 반갑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더듬어서 물건도 찾고 해야 할 일을 하기도 했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그냥 눈앞만 캄캄했다. 전기가 다시 들어왔을 때 환호를 지르긴 했지만, 정전이 무서웠다기보다는 그냥 다른 이들이 그렇게 하니 나도 그렇게 했을 뿐이다. 처음 보이지 않는 눈을 가지게 되었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눈앞이 캄캄했다. 모든 게 없어진 것만 같고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굉장히 무섭고 두려웠다. 빨리 불이 켜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정전과는 다르게 내 앞에 불이 다시 켜지지는 않았지만, 정전의 경험 덕분인지 캄캄해지는 것이 모든 것을 없어지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은 알았다. 밝았던 세상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것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건 내게 낯선 풍경이었을 뿐 크게 나빠진 것은 아니었다. 장난감도 만지고 물도 마시고 화장실도 당연히 갈 수 있었지만,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었다. 그전에 하던 대부분의 일들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내가 마주한 상황이 단지 눈앞만 캄캄해진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큰 어려움을 마주했을 때 눈앞이 캄캄해졌다고 말한다. 처음 정전을 경험했던 어린 나처럼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예상 못 한 사건을 무섭고 두렵다고 느낀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오래지 않아 다시 불이 켜지기도 하고 다시 켜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그대로 내 주위에 존재한다.

단지 눈앞만 캄캄해졌을 뿐이다. 늘 하던 대로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면 된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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