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오늘도 하이볼 만드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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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잔에 얼음과 위스키, 탄산수 등을 채우고 레몬 조각을 띄운 칵테일 ⓒ픽사베이
▲유리잔에 얼음과 위스키, 탄산수 등을 채우고 레몬 조각을 띄운 칵테일 ⓒ픽사베이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술 좋아하는 사람들의 취향이 맥주나 소주에서 위스키나 와인으로 급격히 옮겨가는 듯하다. 여전히 “삼겹살에 소주” “갈증엔 맥주가 최고!”라고 외치는 고전파들이 있지만, 이전에 비한다면 전에는 접하기 어려웠던 새로운 주종들이 술상을 점유하는 비중이 확실히 높아졌다.

언젠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하이볼은 술 잘 모르거나 먹지 않던 사람까지 주류문화의 흐름에 동참하게 만들고 있다. 당연히 그런 흐름에 빠질 수 없는 나도 각종 위스키와 탄산음료를 모으고 배합하고 향을 맡고 맛보는 일을 취미로 추가했다. 테이스팅 노트에 적힌 플로럴, 시트러스, 스파이시, 플루티, 바닐라 같은 향들이 여전히 이 독한 알코올 속에 존재하는 것인지 내 코로서는 큰 확신이 들지 않지만, 컨디션 좋은 어느날엔 그 비슷한 느낌이 드는 듯도 하다.

전용 잔에 따르고 온 신경을 코에 집중해 본다. 잘 모르지만, 어울릴 것 같은 탄산음료와 첨가물을 고르고 얼음과 함께 잘 젓는다. 맛을 보고 술을 조금 더 넣어보기도 하고 다른 액체를 첨가해 보기도 한다. ‘술에다 음료 섞은 것이 거기서 거기겠지’라는 생각과는 달리 조금의 배합만 바꿔도 완전히 다른 향과 맛이 난다. 같은 위스키와 같은 음료를 섞어도 그 양의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른 매력이 느껴지는 것이 신기하다. ‘이번엔 실패야!’라고 느낄 때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른 무언가를 조금 넣어주면 기가 막힌 조합으로 완성되는 것은 경이로울 지경이다. 위스키 그 자체로 니트를 즐길 땐 거의 느껴지지 않던 테이스팅 노트의 향들이 오히려 다른 것들과 섞인 이후에 진하게 올라온다. 내친김에 전통주 하이볼도 만들어 보고 소주와 맥주로도 나름의 칵테일을 제조해 본다. 예상과는 달리 재료의 가격과는 관계없이 최적의 조합 안에서 굉장한 결과가 만들어진다.

사실 위스키라는 술은 원래부터 블렌딩 작업으로 만들어진 조화의 예술이란 것을 생각하면 그리 놀랍지도 않다. 싱글몰트라 하더라도 어디에서 자란 보리를 어떤 연료로 누가 말리고 발효시키고 증류했는지에 따라 처음의 향이 달라지고 또 그것들이 어떤 오크통의 숙성을 거치느냐에 따라 또 다른 피니시가 입혀진다. 같은 과정을 거친 한 증류소의 술이라 하더라도 오묘하게 다른 것들이 있어 마스터 블렌더는 그것들을 적절히 블렌딩하고 최종 병입을 한다. 숙성을 전혀 거치지 않은 스피릿 자체를 매력으로 내놓는 술도 있지만 위스키는 적어도 몇 년이 상의 숙성기간을 포함해야 하므로 다양한 조합을 찾고 섞어내는 과정이 맛과 향을 결정하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된다. 우리집에서 이루어지는 하이볼 제조 과정은 또 한 번의 블렌딩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세상엔 참 많은 사람이 살아간다. 살다 보면 같은 공간에 섞이기도 하고 함께 협력해서 일을 할 때도 있다. 호흡이 척척 맞는 마음의 파트너도 만나지만 체감상으로는 저 사람만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사람과 팀이 될 때가 더 많다. 독한 술에 또 다른 독한 술을 섞은 것처럼 혹은 소주에 물이 들어간 것처럼 나와 결이 다른 사람과의 공존은 한순간 한순간이 괴로움이 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또 다른 사람의 합류나 적절한 역할의 분배는 의외로 좋은 팀워크로 가는 간단한 해결책이 되기도 했다. 맘에 들지 않는 부장님을 만났지만, 부장님 잘 다독이는 동료 부원 덕분에 나의 부담도 줄고 때때로 부장님의 다른 매력이 보였다. 한 명 한 명 뜯어보면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 같던 축구팀이 탁월한 팀플레이로 국제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한다.

우리는 각자의 환경에서 길러지고 말려지고 발효되고 증류된 스피릿과 같다. 각자의 시간 속에서 숙성되고 성장하는 과정을 거쳐 지금의 위치로 블렌딩 되었다. 최고의 마스터 블렌더가 병입하고 판매되는 위스키처럼 각자는 최선을 다했지만, 가격과 관계없이 취향에 맞지 않는 술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현재를 만족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아직 우리는 하이볼이 될 기회가 남아있다. 우리의 풍미를 높여줄 특별한 탄산수를 만날 수도 있고 조금의 역할조정으로 예상 못 한 최선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의 블렌딩은 아직 진행 중이다. 값비싼 위스키의 첫맛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당장 실망하고 버리는 애주가는 없다. 뚜껑을 열어 브리딩의 마법을 기다려보고 모양이 다른 테이스팅 글라스에 따라 보기도 하고 칵테일로 만들어 보기도 한다. 술에 진심인 애주가는 결국 최적의 조합을 찾아낸다. 그때에서야 우리는 없을 것만 같던 테이스팅 노트의 향들을 만나고 어쩌면 다른 누군가 거쳐 가지 못한 새로운 맛과 향을 만날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각자 숭고한 시간을 견뎌온 위스키와 같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최고의 블렌딩을 찾아가는 일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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