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호의 차별 속으로] 횡단보도와 법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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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 숲 가득한 도시를 향해 승용차 한 대가 라이트를 켜고 달려가는데 도로 위에 사람이 누워있다. © 김소하 작가
▲빌딩 숲 가득한 도시를 향해 승용차 한 대가 라이트를 켜고 달려가는데 도로 위에 사람이 누워있다. © 김소하 작가

  • 횡단보도는 평등한가?

[더인디고=이민호 집필위원]

이민호 집필위원
▲이민호 더인디고 집필위원

윤석열 대통령은 작년 한 국무회의에서 “법치는 모든 사람이 함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제도”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법치주의는 무엇일까?

사전을 찾아보니 ‘법치주의(法治主義)는 사람이나 폭력이 아닌 법이 지배하는 국가원리이자, 헌법원리이며 공포되고 명확하게 규정된 법으로 권력을 제한·통제함으로써 자의적인 지배를 배격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글로만 봐서는 이해가 가지 않아 법치주의가 작동되고 있는 곳을 찾아보았다. 우리 주변에 흔히 존재하는 횡단보도가 그것을 잘 설명해주고 있었다.

크기나 속도 면에서 자동차는 사람보다 강자이다. 자동차가 속도를 무기로 멈추지 않거나 힘으로 몰아붙이면 사람은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거나 반대편으로 건너가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도로교통법에 따라 보행자가 안전하게 건너갈 수 있도록 횡단보도와 신호등을 설치해야 한다. 아울러 횡단보도에 사람이 있다면 무조건 일시 정지해야 하고 없어도 언제든 정지할 수 있도록 서행해야 한다. 자동차도 사람도 빨간 불에 멈추고 녹색불에 움직여야 한다. 자동차가 도로를 장악하고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자동차의 권력을 통제하고 제한하는 것이다. 그 통제를 벗어나 자동차에 의해 사람이 피해를 보면 법률로 따라 책임을 묻는다.

공정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법치주의라는 시스템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을 통해 만들어진 기준이 모든 사람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있을까?

길을 가다 우연히 손수레를 끌고 6차선 횡단보도를 건너는 노인을 봤다. 절반을 지났을 뿐인데 녹색불이 깜빡거리며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자동차들은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육상선수들처럼 노인을 노려봤다. 경적을 울리고 머리를 들이밀며 제발 빨리 건너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노인의 걸음걸이는 빨라지지 않았다. 자칫 위험한 상황에 노출될 것 같았다.

현행 도로교통법에 의하면 6차선 폭은 18m이고, 0.5m 경계선 양쪽 1m를 더해 총19m가 된다. 녹색불은 횡단보도 앞에 사람이 도달할 때까지 주어지는 진입 시간 7초에 보행 시간 25초를 더해 총 32초이다. 현재 국내 성인 평균 보행 속도는 32초간 32m, 노인은 25.6m이다.

19m보다 부족하다고 할 수 없지만, 모든 사람에게 이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 노령화로 인해 걸음 속도가 느리거나 손수레를 끄는 노인, 아이를 가진 임산부, 목발이나 수동휠체어 같은 각종 보조기구를 이용하는 장애인에게는 이 시간도 매우 짧다.

실제 국내 보행 중 교통사고 사망 노인 비율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2021년 11월 7일 행정안전부 발간 자료에 의하면, 국내 교통사고 사망자 가운데 노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지난 2016년 50.5%에서 2020년 57.5%로 증가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법치주의가 정한 기준이 모든 사람의 자유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법조차도 지키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얼마 전 국민의힘 시민단체선진화특별위원회 하태경 위원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서울시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 일자리(아래 ‘권리중심 일자리’)’ 참여자들이 캠페인을 빙자한 집회와 시위에 참여하고 있으며 ‘관련 예산 81억 중 40억 원이 집회에 전용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주장을 토대로 서울시 경찰청에 수사를 의뢰했다.

‘권리중심 일자리’는 UN장애인권리협약에 따라 장애 정도가 심해 일자리를 찾기 어려운 중증 장애인에게 우선적으로 맞춤형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업이다. 2014년 10월 UN장애인권리위원회는 ‘한국의 장애인권리협약 이행 상황에 대한 최종견해’에서 “공무원, 국회의원, 언론, 그리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협약의 내용과 목적에 대해 공론화하고 교육시키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한다”면서 “장애인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는 인식 제고 캠페인을 벌일 것”을 한국 정부에 권고했다.

대한민국 헌법 제6조에 ‘체결·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라고 명시되어 있는데 국내 최상위 법률인 헌법을 거스르는 것이다. 법치를 실현해야 할 헌법 기관인 국회의원이 횡단보도와 신호등을 철거해버린 것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대구 지역 다릿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권익옹호 팀장으로 활동하는 장애인 당사자입니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장애 인권 이슈를 ‘더인디고’를 통해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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