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준의 다름알기] 구겨지니까 셔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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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츠들이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려있다 ©Unsplash
▲셔츠들이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려있다 ©Unsplash

[더인디고 = 안승준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안승준 더인디고 집필위원

깔끔하게 다려진 셔츠를 입은 출근날엔 마음마저 단정해지는 기분 좋은 느낌이 든다. 살포시 피부에 내려앉은 가벼운 포근함도, 움직일 때마다 스치는 부드러운 마찰도 왠지 모르게 정갈함으로 다가온다.

“오늘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셔츠 정말 예쁘네요.” 소리라도 들으면 그날의 기분은 출발부터 공중을 부양한다. 보이지도 않는 거울 앞에 괜스레 서 보기도 하고 다른 이들이 나를 보고 있지는 않은지 은근슬쩍 눈치도 살펴본다.

그런데 이 셔츠라는 것이 다려놓은 그대로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는 능력은 워낙에 없는지라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면 여기저기 주름이 생긴다. 나보다 훨씬 정돈된 움직임을 보이는 이들은 얼마나 더 오랜 시간 그 단정함을 유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셔츠는 오전이 다 가기 전에 다려지지 않았던 그때의 주름들을 회복한다. 점심시간도 되기 전에 누군가에게 “셔츠 좀 다리셔야겠어요.” 소리를 듣는 걸 보면 나의 행동은 남들보다 아주 부산스럽기는 한가 보다.

오늘도 동료 선생님께서 “아이고! 선생님 셔츠가 벌써 많이 구겨졌네요. 아침엔 깔끔했는데!” 하시기에 순간적으로 웃으며 “구겨지니까 셔츠지요. 안 구겨지면 갑옷이게요.”라고 농담을 던졌다. 아무 생각 없이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스스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깔끔하게 다린 셔츠도 입고 있는 사람이 움직이면 조금씩 구겨질 수밖에 없다. 주름에서 자유로운 재질이 있다고는 하지만 덜 구겨질 뿐 절대 구겨지지 않는 셔츠는 없다. 셔츠를 예쁘게 입기 위해 움직이지 않을 수는 없다. 구겨지면 다시 세탁하고 다시 다림질하면 된다. 갑옷처럼 단단히 고정되는 셔츠를 만들 수야 있겠지만 그것을 입고 생활하는 것이 편할 리 없고 그것은 갑옷이지 셔츠가 아니다.

직장에서 사회에서 이렇게 저렇게 사람들 만나며 사는 내 마음도 셔츠와 같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좋은 사람을 사귀고 기분 좋은 만남을 하다 보면 잘 다려진 셔츠처럼 특별한 이유 없이 관계 자체가 즐겁고 행복할 때가 있다. 그들이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일이 없어도 그렇다. 그런데 관계에서 오는 그런 마음들도 오전에 다린 셔츠처럼 그 깔끔함이 언제까지 그대로 유지되지는 않는다. 스치고 부딪히고 하다 보면 어느새 이리저리 구겨지고 주름이 잡힌다. 한없이 존경하고 싶은 선배의 부끄러운 면에 실망하기도 하고 “의리! 의리!”하는 친구에게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가족에게도 동료에게도 오랜 시간 만나다 보면 실망하고 맘에 들지 않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구겨지는 셔츠처럼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구겨지지 않으면 셔츠가 아닌 것처럼 상처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관계가 아니다. 남들보다 조금은 단단한 멘탈을 가진 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 또한 상처에 대한 역치가 조금 높을 뿐 구겨지지 않는 마음을 가졌을 리 없다.

오늘 셔츠가 많이 구겨졌다면 내일 아침 다시 다리미를 꺼내면 된다. 셔츠에 주름이 많이 생겼다고 그 셔츠를 버리는 이가 없는 것은 그것은 다시 다려질 수 있는 좋은 옷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좋은 셔츠를 고르기 위해 많은 선택지를 지나왔고 값비싼 돈을 지불하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믿는 사람에게 상처받았다면 그 또한 다시 다잡아야 한다. 그와 관계 맺기 위해 우리는 많은 시간 고민했고 오랜 시간 즐거웠다. 상처 주지 않고 항상 좋기만 한 관계는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미 그는 사람이 아니다.

많이 움직일수록 셔츠는 구겨지고 깊게 관계할수록 마음에도 주름이 진다. 이른 아침 셔츠를 다리는 마음으로 조금 틀어진 나의 관계들을 제자리로 천천히 돌려보자! 깔끔하게 다시 다려진 셔츠처럼 다시 좋아진 나의 관계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구겨지니까 셔츠이고 상처를 줄 수 있어서 사람이다.

[더인디고 THE INDIGO]

한빛맹학교 수학 교사, "우리는 모두 다르다"를 주장하는 칼럼리스트이자 강연가이다. 밴드 플라마의 작사가이자 보컬이다. 누구나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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